CAFE

접속 _ 이사야 58:1~7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18.05.06|조회수117 목록 댓글 1


신대원에서 함께 공부했단 분 중에 김일성 대학교를 졸업하시고, 탈북하신 분이 있습니다. 한 번은 점심 식사를 하는데, 버섯이 반찬으로 나왔습니다. 무심하게 한 마디 물었습니다. 이북에는 산이 많아서, 버섯이 많지 않느냐고, 별 뜻 없이 지나가는 말로 물었습니다. 큰 실수인줄, 채 10초도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 고향이 함경도 용천인데 유독 산이 많은 곳이고, 어렸을 때, 산에서 버섯을 따다가 구워먹던 이야기를 하시다가, 90년대 당시 가뭄으로 기근이 심해서, 버섯도 씨가 말랐노라고, 하시며 눈물을 훔치셨습니다. 어찌어찌 식사는 끝냈지만, 저는 그 분 생각에 미안해서, 그 분은 가족들 생각에 목이매어, 식사를 제대로 못한 적이 있습니다. 갈 수 없는 땅이 있고, 갈 수 없는 땅이 고향인 사람이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갈 수 없는 고향 땅을 하릴없이 그리워만 할 때가 있었습니다. 유다를 멸망시킨 느부갓네살 왕이 유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다가 바빌론 강가 기슭에 머물게 한 것입니다. 사람이란, 저 태어난 곳을 떠나면, 어깨 죽지에 힘이 빠지고, 눈물샘에선 그치지 않는 눈물이 솟기 마련입니다. 스스로 고향을 떠난 것이라면 또 모르겠거니와, 타인에 의하여 억지로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의 서러움을 누가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강은 흐르고 흘러 바다에 이르건만, 유대인들에겐 달려갈 고향이 없습니다. 태양은 서쪽으로 졌다가도 동쪽에서 다시 떠오르는데, 유대인들에겐 고향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마저 솟아오르지 않았습니다. 하여, 유대인들은 끌려올 때 가져왔던 비파를 버드나무 가지에 걸어두고, 노래 부르기를 포기했습니다. 이 때 지어진 시가 시137편입니다. 시137편 1절부터 6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 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고향을 빼앗긴 유대인들은 비파를 버드나무에 걸어놓은 채, 강물이 흘러 바다로 가듯, 유다로 가게 될 날, 쌓이고 쌓인 속울음이 기어이 기쁨으로 터져 나올 날, 눈물을 쏟으며, 저 비파를 들고 여호와를 찬양하리라는 소원과 다짐을 심장에 새길 뿐입니다.


영원히 패권을 빼앗기지 않을 것 같던, 바빌론이 무너지고, 바사가 그 패권을 빼앗아왔습니다. 고레스의 칙령이 내려지고, 유다인들은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빌론 강가에서 담가두었던 슬픔의 눈물이, 삭혀지고 삭혀져서 기쁨의 눈물로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유대인들은 버드나무에서 비파를 내려 가슴팍에 안았습니다. 비파를 가슴에 안자 굳어있던 손가락이 풀렸습니다. 잊혀졌던 악상들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해방의 노래만, 계속 부르고 있을 순 없었습니다. 유다의 귀향은 곧 바사의 패권도 약해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요, 강대국의 패권이 약해진 틈새에서는 중소국들간의 새로운 패권 쟁취를 위한 전쟁의 씨앗이 발아하기 마련인 까닭입니다.


전쟁의 소문이 퍼져나갔고, 외침을 막아내기 위해, 유대인들 사이엔 서둘러 성벽과 성전 재건을 통해 국가 기반을 빨리 다져야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기도 하였습니다. 해방의 기쁨을 동력삼아, 유대인들은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습니다. 혹시, 건축 도중에 있을지도 모를 침입에 대비하여, 한 손에는 칼을 들고, 한 손에는 삽을 들고 일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빠르게 진행되어야 할 재건 공사가 더디게 진척되었습니다. 인근 나라들의 방해 공작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이요, 엎친 데 덮친 격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똥 누는데 주저앉히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하나님을 향하여 비아냥대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유대 지도자들은 금식을 시작했습니다. 금식하면서, 유대인들은 날마다 우림과 둠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애썼습니다. 또, 금식으로 힘이 없어 가늘어진 목소리로 간절하게 탄식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어찌 된 일입니까? 성전을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또, 하나님께서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옳은 일을 하는 데도 왜 이리 더디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살펴 시작한 일 아니었습니까? 하나님, 이래도 되는겁니까? 이젠, 금식까지 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같은 백성이 하늘아래 어디 있습니까? 가장 선한 우리를 가장 악하게 대하시는 연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기도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선, 유대인들의 기도에 응답해주셨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께서 입을 여셨습니다. 아니, 기도하는 자들의 귀가 열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4절부터 7절이 유대인들의 금식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너희들이 금식하는 날, 너희 자신의 향락만을 찾고, 일꾼들에게는 무리하게 일을 시킨다. 너희가 다투고 다투면서, 금식을 하는구나. 이렇게 못된 주먹질이나 하려고 금식을 하느냐? 너희의 목소리를 저 높은 곳에 들리게 할 생각이 있다면, 오늘과 같은 금식을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겠느냐? 이것이 어찌 사람이 통회하며 괴로워하는 날이 되겠느냐?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는다고 해서 어찌 이것을 금식이라고 하겠으며, 주님께서 너희를 기쁘게 반기실 날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수학능력사험을 앞둔 수험생의 학부모들이 부처 앞에 치성을 드리듯, 많은 성도들은 금식하며 자녀를 위해 기도합니다. 이때, 이루어지는 금식기도를 통하여, 하늘 보좌가 움직이고, 기적 같고, 초자연적인 축복이 임할 것만 같습니다. 실력 이상의 요행을 바라며 드리는 금식기도는 세련된 부정행위입니다. 거의 모든 기도원에서 권장되는 금식기도는 지극히 개인적이기만 합니다. 우리의 금식은 개인적인 차원을 뛰어넘어 좀 더 차원 높은 곳으로 도약할 순 없을까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 참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금식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금식이란, 계획했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복잡하게 얼키고설킨 실타래를 풀기 위한 주문이 아닙니다. 참된 금식이란 어려운 대사를 앞두고, 그 일의 성취를 위해 권력자이신 하나님에게 로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금식이란, 스스로를 쳐 괴롭게 함으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고행은 더더욱 아닙니다.


위장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곳간과 돈지갑을 비우는 것이 참된 금식입니다. 다시 말해,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운 사람을 돌보는 것이 참된 금식입니다.


금식은 괴로운 것입니다. 먹고자 하는 욕구를 억제하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금식하는 자에겐 괴로움도 있지만, 괴로움이 있는 까닭에 긍지도 있습니다. 금식하는 사람의 긍지는 그렇지 않는 이들보다 우월하다는 영적교만으로 발전합니다. 영적교만이 하늘로 치달아 종교적인 엑스타시에 이르면, 금식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요 향락입니다(3). 종교적 엑스타시로 인한 향락은 금식하는 자를 거룩한 자로 포장합니다. 이렇게 되면, 금식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간 데 없고, 금식 기도 하는 자가 스스로 하나님이 됩니다. 하나님이 된, 금식자는 무엇을 의도하고, 어떤 행동을 하든 스스로 거룩한 사람입니다. 이렇듯, 자신을 위한 금식, 자신이 범한 모든 과오와 범죄의 그림자를 가려주는 금식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금식을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나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금식이 아닌,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참된 금식을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선 우리들에게 참으로 바른 금식이 무엇인지, 분명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


바사로부터 돌아왔지만, 정치적으로 유다는 여전히 바사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고향 땅엔 물자가 귀했고, 농사는 흉년이었습니다. 또, 고리대금업이 성행하였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유대인들이 집과 포도원과 밭을 저당잡히고, 고리의 사채를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마저 없는 사람들은 아들과 딸을 종으로 팔아야 했습니다(느5장). 본문의 흉악의 결박이란 식민지 백성이 갖는 압박감이요, 멍에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노예로 팔려간 아들과 딸이 감당해야 했던 생활의 무게입니다. 고리로 빌린 빚을 갚기 버거웠던 사람들에게 사채업자들의 공공연한 모욕과 압력은 바빌론 사람들의 압제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금식은 이 상황들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바사의 식민지 백성이라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하나님께서 완전한 해방을 주실 것임을 믿도록 권면하는 것입니다. 특히, 부유한 귀족과 민장들이 드려야 할 참된 금식은 저당 잡은 포도원과 밭과 집을 돌려주는 것이요, 또, 돈을 빌려준 사채업자에게 참된 금식이란 이자를 받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식민지 경험을 하였습니다. 이제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식민지 경험은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 징용군인들,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에게 식민지 시절의 압박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무정한 일본 내각과 무능한 대한민국 정부는 그 분들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했습니다. 교회는 가해자와 정부를 비난하기 전에 아픔과 한을 고스란히 간직한 사람들의 상처를 복음의 빛으로 치유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그분들이 실제적인 보상과 배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을 함께 모색하고, 생계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또, 우리나라는 전쟁을 경험하였고, 전쟁 이후에 이남과 이북 공히 독재를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어떤 개인도 주권을 독점해선 안 됩니다. 반독재 세력과 개인들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형장의 이슬이 되어야 했고,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평생을 보내야 했습니다. 교회는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피가 땅속에서 탄원하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교회는 소위 사상범이라는 죄목으로 간첩의 누명을 쓴 채, 하릴없는 인생을 보내야 하는 사람들의 잿빛가슴을 쓸어주어야 합니다.


고종 황제 때에, 4년간 지속되었던 곤당골이라 이름지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곤당골이란 ‘고은 담(장) 골’이란 말에서 유래하였지만, 조선 사람들은 고은 담장 안에 사는 사람들을 고운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곤당골 사람들은 의관을 차려입어선 안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색이 신분을 상징하던 시대에, 의관을 차릴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불가촉천민이라고 부릅니다. 곤당골 교회는 불가촉천민인 백정들이 중심이 되어 모였던 교회입니다. 곤당골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었던 사람은 S.F.무어라는 선교사였습니다. 무어는 백정들을 묶고 있는 흉악의 결박을 풀어내고, 멍에의 짐을 가볍게 하며, 압제로부터 자유를 얻게 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국왕에게 청원하여 백정들도 갓을 써도 된다는 어명을 받아낸 것입니다.


또, 한 번은 곤당골교회에 출석하던 백정이 장질부사에 걸려 고생하고 있을 때, 고종 황제의 시의를 청하여 치료를 받게 해주었습니다. 불가촉천민이 황제의 시의로부터 치료를 받는다는 것은 당시에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부정한 한센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해주셨던, 예수님처럼, 무어는 백정들의 몸과 마음을 치유해주었습니다.


세브란스 의과전문학교 1회 졸업생 중 박서양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박서양의 아버지 박성춘은 바로 백정이었습니다. 아마도 백정 박성춘은 선교사 무어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 박서양의 아버지는 무어 선교사의 사랑어린 노력에 감동을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은 선교사들의 배려로 세브란스를 졸업하고 한국 최초의 외과의사가 되었습니다. 돼지의 멱을 따던 식칼이 이젠 종양을 떼어내는 의도가 되었습니다. 공을 만들기 위해 오줌보를 꿰매던 대바늘이 벌어진 상처를 봉합하는 의침이 되었습니다. 지긋지긋하던 신분의 멍에를 벗게 되었습니다. 무어가 굶으면서 기도했는지를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 무어가 참된 금식을 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엔 넉넉한 증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주며 유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금식하는 자들엔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음식을 광에 쌓아둔 채 일부러 자신을 괴롭게 하며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사람들과, 음식이 없어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가녀린 그러나, 깊은 한 숨으로 기도를 대신하는 사람들입니다. 음식을 광에 쌓아둔 채 일부러 자신을 괴롭히며 부르짖는 기도는 하나님의 고막을 때리지만, 음식이 없어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내뱉은 신음 소리는 하나님의 심장을 찢습니다.


본문에서 빈민이란, 지붕이 없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돈이 없어 집을 저당잡혔다가 빼앗긴 사람들이 소주 한 잔으로 몸을 데우고, 이젠 빼앗겨버린 남의 집의 담벼락 밑에서 밤이슬을 마시며 노숙할 때, 금식자는 고리로 빼앗은 집에서 새로 들인 노예들에게 집안일을 맡겨놓고서, 재를 뒤집어쓰고, 하늘을 향하여 쇠전 냄새 밴 손을 뻗어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돈 냄새 배어있는 손을 기뻐하실 리 없습니다. 오히려, 노숙자의 술주정을 기도로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프랑스의 주르날 뒤 디망슈 신문은 매년 프랑스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인물을 여론조사를 통해 선정합니다. 지난 8월 올해 가장 사랑받는 프랑스인 1위를 차지한 사람은 아베 피에르, 피에르 신부였습니다. 피에르 신부는 올해까지 17번째, 1위에 뽑혔다고 합니다. 피에르 신부는 1938년 신부 서품을 받았고, 2차 대전 중엔 목숨을 걸고 유대인들을 피신시키는 일을 주도하였고, 종전 후엔 의회에 진출하였는데, 의원 월급을 노숙자들 거두는데 모두 썼다고 합니다. 또, 노숙자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주기 위해 넝마주이 건축가 단체인 엠마우스를 설립하여 빈민 구제 운동에 헌신했습니다. 엠마우스 운동은 오늘날 4000명의 회원이 함께 살면서 노동하는 공동체로 전세계 5대륙 30국 84지부로 확대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사회복지 시스템은 프랑스 정부의 역량이라기보다, 노숙자를 먹이고 입혀주며, 재활의 여건을 마련해주었던 참된 금식을 행했던 사람들에 의해 구축되었습니다. 경제위기를 이야기하고, 경기침체를 걱정합니다. 경제 위기 극복과 경기의 회복은 공예배에서 빠지지 않는 기도제목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부족한 것은 재화의 양이 아니라 나눔의 양 아니냐? 나는 너희에게 다 주지 않았느냐”


아베 피에르가 노숙자에게 나누어주었던 의원 월급은 누룩이 되어, 오늘날 4000명을 먹이는 기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선 언제든지 참된 금식을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십니다. 피에르 신부는 참된 금식을 독려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굶주린 자는 빵을 갖게 하고, 빵을 가진 자는 정의와 사랑에 굶주리게 하라.”


마지막으로, 참된 금식은 골육지간의 어려운 상황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라고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7b)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를 꺾어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여도, 또, 주린자에게 음식을 베풀고, 집 없는 자에게 지붕을 이어주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어도, 여전히 소외된 사람들은 있기 마련입니다. 소외된 이들 중에 또 소외된 사람들은 골육지친들이 거두어야 합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이 세상에서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는 이들이 생겨나는 것은 타락으로 인해 정해진 이치입니다. 구제의 그물에 걸릴 수 있었던 사람은 그래도, 나은 사람들입니다. 그마저도, 구제의 그물에 걸리지 못한 사람은 소외된 사람들 중에서도 더 작고, 더 약하고, 더 가난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지극히 작은 사람은 소외된 사람들 중에서 또,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어찌해야 합니까? 국가도 교회도 책임질 수 없는 사람들을... 골육지친, 친척들이 숨어 피하지 아니하고, 돌볼 수 밖에 없습니다.


전체 자살 사건 가운데 ‘빈곤 자살’의 비율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습니다. 전체 자살 사건 가운데 가난으로 인해 목숨을 끊는 비율은 2000년에는 3.9%에 그쳤으나 2001년 4.28%, 2002년 4.6%, 올해 6.8%로 증가하였습니다. ‘통일벼’를 심으면서, 보릿고개는 없어졌고, 음식물쓰레기 줄이기 운동을 하는 우리 시대에 빈곤을 비관하여 자살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누울 곳 없는 처지를 비관하며 죽은 사람들이 우리 시대. 아무리 경제가 어렵다 해도, 경기가 바닥을 친다 해도, 우리 시대는 결코 곳간이 비어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 포도열매가 없고, 논밭에 식물이 없음을 걱정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자살을 합니다. 또, 더하여 동반 자살을 합니다.


자녀와 함께 동반자살을 시도했던 부모는 죽기 전에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면서 자식의 앞날을 미리 그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회보장제도의 결핍, 부모 없는 아이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들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 자식을 남겨두는 것보다 빨리 목숨을 끊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생사여탈권을 부모가 지니고 있다는 어처구니 없는 법적용과 월권행위의 원인은 우리 사회에 있습니다. 빈곤 자살은 사회적 타살입니다. 나아가 동반자살에 이르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사회에게 연쇄살인교사죄를 물어야합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어려운 여건에 처하더라도,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아니하는 친척이 있었다면, 자살은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친척이 되어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살인방조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살인하지 말찌니라”


2003년 9월 27일 우리나라 최초로 과학기술위성이 발사되었습니다. 그런데, 3일 동안 10차례나 교신에 실패해, 최초의 과학위성은 우주미아가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돋아났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3일 째인 29일 밤에 지상국과 위성 간에 접속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처럼, 가슴 졸인 첫 교신이 늦어진 것은 발사 전에 계산된 위성의 예상 위치와 발사 이후의 실제 위치 사이에 오차가 발생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금식하는 자들이 기도하며 바라는 바와 하나님의 뜻 사이엔 상당한 오차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마음을 괴롭게 하고, 굵은 베와 재 위에서, 머리를 무릎 사이에 집어넣은 채 기도한다 하여도, 하나님께서 어디에 계신지를 잘못 계산하면, 하나님과의 교신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공 위성은 높은 곳에 있지만, 하나님께선 바닥에 계십니다. 하니님께선 결박에 묶인 사람, 멍에에 메인 사람, 압제 아래 있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계십니다. 기도는 위로 쏘아 올리는 것이라기 보다, 아래로 쏟아 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바닥으로 우리의 기도를 쏟아 부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 접속됩니다. 하나님의 채널은 고행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고행이 아닌 사랑에 채널을 맞추고, 하나님께서 계신 곳으로 우리의 기도를 쏘아 올릴 때, 하나님과 우리는 접속됩니다.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라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58:8-9a)


바빌론 강가 버드나무에 비파를 걸어두고 슬픔을 삭히고 있을 때에, 유대 사람들은 바빌론의 포로가 된 것이 약했기 때문이라 생각했습니다. 오욕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만이 강화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70년 동안 혹독한 시련을 수업료로 지불하며 배운 것은 “강해져야한다”는 것뿐이었습니다. 하여, 성전과 성벽의 신속한 재건을 위해 헌신하다가, 조국의 재건 사업이 더디자, 금식함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겉으로 보기에 신실한 이 사람들에게 불같은 열정은 있었지만, 백성들을 사랑하는 젖은 눈과 뜨거운 심장은 없었습니다. 안식일에도 건설 현장에 끌려가 일하고 있던 유다 백성들의 거친 숨소리가, 집과 밭과 아들과 딸을 빼앗긴 가난한 사람들의 한숨이 기도가 되어 하나님의 눈을 적셨고, 하나님의 눈에 고인 눈물 때문에 성전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흐려져 갔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따뜻해지는 것입니다. 참된 금식은 스스로를 괴로움으로 묶는 것이 아니라, 묶인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참된 금식은 위와 장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곳간과 주머니를 비우는 것입니다. 참된 금식을 행하는 자들이 된다면, 참된 금식을 행하는 자들에게, 참된 금식을 행함으로 하나님과 접속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하리라...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58:9-11)”

참된 금식을 행하는 사람이 '물 댄 동산'을 삽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김영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8.05.06 2004년 신대원 재학 중 신학생들과 나누었던 설교입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