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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빛나는 밤 _ 막6:30~52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18.09.02|조회수110 목록 댓글 0

2018-9-2 민들레교회 김영준 목사

마가복음 6:30~52

별이 빛나는 밤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었습니다.(막6:31) 예수님과 제자들은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짬을 내어 한적한 곳에서 쉬려 했지만, 사람들이 미리 와 있었습니다.(막6:33)


사람들은 “목자 없는 양”같습니다.(막6:34) 제사장이 있었지만 목자 없는 양 같습니다. 왕이 있었지만 목자 없는 양 같습니다. 율법 교사들이 있었지만 목자 없는 양 같습니다. 제사장이 있고 왕이 있고 율법교사가 있지만, 목자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같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가르치십니다.


사람들과 예수님이 만난 공간은 “빈들”입니다. 성전이 아니라 “빈들”입니다. 궁전이 아니라 “빈들”입니다. 교실이 아니라 “빈들”입니다. 아무 것도 없었을 “빈들”에서 예수님은 사람을 만나십니다. 어떤 종교제의도 어떤 격식도 어떤 책도 없이, 예수님은 “빈들”에서 사람들을 만나십니다. 하늘이 열려 있어 볕이 따가운 “빈들”에서 사람들을 만나십니다.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한 줌 바람에 공들인 언어가 흩어져버리는 “빈들”에서 사람들을 만나십니다. 빈들은 낭만적이지만, 불편한 곳입니다.


손가락으로 훑어 까먹을 밀밭도 없는 “빈들”에 석양이 내리고,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선선해질 무렵, 배고팠습니다. 예수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말씀으로 배가 부르진 않습니다. 빈들에서 마음은 채워졌지만, 빈들처럼 위장도 비어있습니다.


제자들도 배가 고팠고, 무엇보다 피곤했습니다. 사람들에게 회개를 요청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병자들을 고치며, 양식도 배낭도 돈도 없이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없이 강행했던 여행에서 돌아온 참에, 쉬지도 못하고 종일 빈들에서 예수님을 보좌했기 때문입니다.(막6:7~13,30~31)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 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막6:35~36) 해산을 제안했습니다.


예수님은 반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제자들이 답하는데, 말이 날카롭습니다.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막6:37)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래서 걸식하듯 “여행”을 마치고 왔는데, “빈들”에 있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는 게 타당하지도 않고, 야속하게도 들립니다.


이백 데나리온은 없습니다.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하신 예수에게 돈이 있을 리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줄 알면서, 이백 데나리온을 셈하는 말 속엔 분명 날이 서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있는” 걸 물으십니다.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막6:38) 없는 것을 강조하는 제자들에게 “있는” 것을 찾자 하십니다.


“있는” 것을 찾아보니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사람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시는 기적을 베푸십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는 이른 바 낙수효과를 거둘 수 없습니다. 적어도 이백 데나리온은 있어야 사람들의 허기를 면할 낙수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백 데나리온의 낙수로 사람들의 허기를 면하도록 하는 게 아니라,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사람들의 비어있는 위장을 채워주십니다. 허기를 면하는 게 아니라, 배부르게 하십니다.(막6:42)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나누었더니, 열두 광주리의 음식이 남았습니다.(막6:43)


밥을 먹고 나니 사람들의 눈에 생기가 돌았고, 날카롭게 섰던 제자들의 마음도 부드러워졌습니다. 얼마나 좋았을까요. 빈들이었지만, 오천 명이 배부르게 먹는 축제가 열렸던 겁니다. 사람들과 제자들은, 성전에도 궁전에도 교실에도 초대받지 못했던 사람들과 제자들은, 그래서 빈들로 내몰렸을 사람들과 제자들은, 이제 빈들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먹었는데 열두 바구니가 남아 있다면, 십만 명 백만 명도 먹을 수 있겠지요. 식량이 넉넉한데 군대를 모아 나라를 세울 수도 있겠습니다.(막6:40)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여 새 나라를 세우고픈 욕망이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솟았습니다.(요6:15)


이렇게 좋은 때에, 이렇게 배부른 때에, 이렇게 마음이 모아졌을 때에,


예수님은 “즉시” 모인 사람들을 흩어버리십니다.(막6:45) 목자 없는 양 같은 사람들에게 한 없이 약하셨지만, 왕을 세워 스스로 강해지려는 사람들에겐 단호하십니다.(삼상8:5) 그리고,


기도하십니다.(막6:46) 기도는 사람들을 통해 모아진 권력 의지를 흩어버리는 과정입니다. 기도는 사람과 세력이 갖게 되는 욕망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을 채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욕망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일을 그르칠까봐 예수님은 기도하며,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소망을 다시 마음에 새깁니다. 왕좌에 앉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 금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가시관에 찔려야 한다는 것, 기도하며 땅에 오신 목적을 되새깁니다.


제자들에겐 미련이 남습니다. 예수님께서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하셨지만 무시하고 노 젓기를 멈춘 채 호수 가운데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들판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오병이어는 예수께서 베푸신 기적 가운데 가장 달콤한 기적이었습니다. 오병이어는 허기를 면할 소박한 식사에 지나지 않지만, 남은 열 두 바구니로 군량미 삼으면 군대의 지휘관이 되어 훨씬 기름진 식사를 하면서 흔들리는 고깃배에서 잠을 자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가시지 않습니다. 저기 방금 떠나온 기적의 빈들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소망은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주셨던 소망이어야 합니다. 왕좌에 앉을 수 있지만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 강력한 전차부대로 예루살렘을 점령할 수 있지만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위해 우는 것이 소망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욕망의 자리를 쉬 떠날 수 없고, 예수께서 품으셨던 소망의 자리에 서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길’입니다. 길은 문법적으로 이름씨, 즉 명사지만, 실천적으로 움직씨, 즉 동사입니다. 길은 목적지일 수 없습니다. 목적지에 이르게 하는 과정입니다. 길에 머물 순 있지만, 멈출 순 없습니다. 과거에 경험한 기적이 멈춰 선 사람에게, 떠나기를 거부하며 항로 중 닻을 내려버린 사람에게 하나님은 폭풍을 일으키셔서 노 젓지 않을 수 없게 하십니다.(막6:46~47)



밀레, <별이 빛나는 밤>, 1850? 1865?



사람은 누구도 완전할 수 없습니다. 완전하신 예수님을 푯대 삼을 뿐입니다.(빌3:14) 옛 사람들은 별을 기준 삼아 바다를 건넜습니다. 별을 바라보며 노를 젓고, 돛대를 잡았습니다. 누구도 별에 닿을 순 없지만, 누구나 별을 보고 항해합니다. 누구도 예수님이 행하신 완전함에 이를 수 없지만 예수님을 길 삼아 걸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을 별 삼아 노 젓겠습니다.


밤입니다, 별이 빛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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