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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_ 막3:1~6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19.05.26|조회수106 목록 댓글 0

1952년 부산에 부인병원이 세워졌습니다. 당시 병원에 찾아오는 사람들 중엔 주소가 없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진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찾아온 사람들은 무슨 역, 어떤 다리 이름을 주소로 적기도 했습니다. 전쟁 중 피난민들이 많았기 때문이었겠습니다. 입원환자의 40% 정도가 병원비를 내지 못했습니다. 이익을 낼 수 없는 병원, 그러나 치료가 가능하다면 돈이 없어도 치료해주는 병원이 1952년 6•25전쟁 중에 세워졌습니다. 매혜란(Helen Pearl Mackenzie), 매혜영(Catherin Margaret Mackenzie) 자매가 세운 일신(日新)부인병원(현, 일신기독병원)입니다.



매혜란•매혜영 자매는 매켄지(James Noble Mackenzie) 목사의 딸들입니다. 매켄지 목사는 1910년 부산에 오셔서 1938년까지 28년 동안 부산에서 목사로서 성경을 가르치고, 나환자들을 돌보았던 선교사였습니다. 아버지 때문에 부산에서 태어났고, 1938년 아버지께서 은퇴하신 후 호주에서 의학과 간호학을 공부한 매혜란•매혜영 자매는 1952년 다시 부산에 와서 의료선교사로서 소명을 다했습니다.


마가복음엔 반복되는 특이한 표현이 있습니다. 2장 1절입니다.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장 13절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3장 1절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4장 1절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


매혜란•매혜영 자매가 다시 부산으로 가려고 할 때, 아버지 매켄지는 두 딸들을 다시 보지 못할까 힘들어 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다시 부산으로 가는 딸들에게 쓴 편지에서 이사야서를 인용한 찬송시를 적어주었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부산은 매켄지 부부의 아들이 묻혀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아들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두 딸이 다시 갑니다.


어쩌면 다시 가는 것은 더 위험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가셨을 때,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이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의논합니다.(막3:1,6) 매혜란•매혜영 자매가 다시 갔던 한국은 전쟁 중인 땅이었습니다. 한창 전쟁 중인 땅으로 매혜란•매혜영 자매가 다시 간 것입니다. 주소가 없는 전쟁 피난민들을 위해 병원을 세웠습니다. 전쟁 중에도 태어나는 아이들과 산모를 보호하기 위해 부인병원을 세웠습니다. 어려서 죽은 동생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다시 와서 매혜란•매혜형 자매가 전쟁 통에 위험한 사람들을 무수히 살렸습니다.


맥켄지 선교사가 일했던 곳, 예수께서 사람들을 만났던 곳은 모든 사람이 다시 가야할 곳입니다. 거기로 다시 가서 공적 가치를 구하며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사적 이익을 따로 추구하지 않아도, 들의 꽃처럼 아름답게, 하늘의 새처럼 자유롭게 사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믿음으로만 의롭다고 인정받습니다. 위험한 곳이라도 가야할 곳에 가는 것, 거기에서 죽어도 부활이 있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구원은 사적 이익을 계산하지 않고, 공적 가치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공적 가치를 푯대 삼을 때에만 사적 이익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사적 이익에 사로잡히는 사람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인생의 결국에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막4:19) 타락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영달과 가족의 안위를 우선순위로 삼습니다. 자기 자신과 가족에게로 관심의 범위를 좁히는 것이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요, 곧 죄입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사적 이익을 우선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를 떨칠 수 없습니다. 해서, 항상 걱정하고, 쉬지 않고 염려하며, 범사에 유혹을 받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우리를 찾아오시는 이유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가셨던 것처럼,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던 것처럼,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가셔서 가르치셨던 것처럼, 예수께선 다시 걱정하고 염려하고 유혹 속에 있는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예수께서는 매혜란•매혜영 자매와 함께 전쟁 통 사람들에게로 찾아 가십니다. 어쩌면 전쟁 통 속에 사는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다시.


다시 나를 찾아오시거든, 옛날 바리새인과 헤롯당처럼 예수를 죽이지 않아야지요. 자기 자신과 가족의 이익을 우선하지 않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진짜 가족이라 하신 예수님께서 나에게 찾아오십니다.(막3:35) 예수께서 다시 나를 찾아오신다면, 나를 당신의 가족 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가족이 되는 것보다 더 큰 이익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동생 되는 것보다 더 큰 유혹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큰 이익을 취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동생이 되는 유혹에 그냥 무너지겠습니다.


공적 가치는 사적 이익으로 환원됩니다. 공적 가치를 위해 사는 자에게 하나님은, 사적 이익도 누리게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의로운 게 이롭습니다.


혹, 이생에서 이익을 얻지 못한다 해도,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부활이 있거든, 죽음이라도 왜 이익이 아니겠습니까.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1) 주님, 내 일상에 다시 오소서. 주님과 함께 일신(日新), 날마다 새롭게 하소서. 날마다 부활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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