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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커밍Becoming _ 마태복음18장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19.09.08|조회수73 목록 댓글 0

넘어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폭력을 예사로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인의 후예들입니다. 가인의 자손 라멕같은 사람들입니다. 라멕은 자신에게 상처 입히고 상하게 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창4:23)


성경에 의하면 라멕의 조상 가인에 의해 원시 국가가 시작됩니다. 가인은 자신이 사람을 죽였기에 자신도 누군가에 의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폭력을 행사했기에 폭력에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창4:14) 그래서 가인은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위해 성을 쌓았습니다.(창4:17) 합법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국가의 기원이 여기에 있습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자의 두려움에서 국가가 시작됐습니다. 가인이 설계한 원시 국가는 폭력으로만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고, 폭력으로만 자신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상처받지 않으려면 죽여도 되는 게 가인이 세운 원시국가의 질서였습니다.


시간이 오래 지나, 하나님은 히브리 노예들을 세워 새로운 나라를 세우십니다. 모세의 지휘 하에 히브리 노예들을 이집트로부터 해방시켜 폭력이 아니라 말로 통치하는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폭력이 아니라 말로 질서를 유지하고 사람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말을 주셨습니다. “오늘 내가 너희의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신5:1) 하나님은 폭력이 아니라 말씀으로 나라를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폭력이 아니라 말씀으로 통치되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천국에선 그래서, 권력과 무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대단치 않습니다. 가인의 나라에선 권력과 무력이 없는 사람들을 사람취급하지 않았지만, 천국에선 권력이나 무력이 없는 사람이 대인으로 대접받습니다.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18:4) 천국에선 대인으로 대접받지 않으려는 어린 아이 같은 사람이 대인입니다. 천국에선 권력의지가 없는 사람이 권력을 갖습니다.


그러나 우리 일상에선 천국이 무시됩니다.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합니다. 가인은 아벨을 실족하게 했습니다. 실족이란 넘어져 걷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가인은 아벨을 실족하게 했고 끝내 죽게 했습니다. 누군가를 실족하게 하는 건 “범죄”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곡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사람은 죄를 다스릴 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죄를 다스리기는커녕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인의 후예들이 지닌 손발은 제어되어야 합니다.(마18:8)


다행인 것은, 하나님께서 실족한 자들을 끝내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가인의 후예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실족한 작은 자들을 하나님께서 찾으십니다. 주변으로 밀려나거나 아래로 추락한 작은 자들을 다시 중심으로 이끄십니다.(마18:10~14)


실족한 자를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데, 실족하게 하는 자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자, 작은 자를 넘어뜨리는 죄를 범하는 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도 형제입니다.(마18:15) 아벨과 가인은 형제입니다. 가인의 후예들이 다 우리 형제입니다. 라멕도 형제입니다. 그들과 형제의 연을 끊지 않는 것이 원수사랑입니다.


형제인 범죄자들을 그러면 어떻게 만나야할까요.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한 그 범죄자에게 그 행위와 그 행위 때문에 주변으로 밀려난 작은 자들의 고통에 대해 말해주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말하고 공개적으로도 말해야 합니다.(마18:15~16) 말해도 듣지 않거든 기도해야 합니다.(마18:19~20) 하나님께서 범죄자들을 위해서라기보다 실족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를 들으십니다. 범죄자가 작은 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회개해야 작은 자가 실족한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으니까요. 넘어져 걷지 못해 99%의 무리에 들지 못한 1%의 주변인과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범죄자들을 구원하기 위한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18:19)


베드로는 작은 자도 구원받고, 범죄자도 회개하는 천국의 방식이 뭔가 마뜩치 않습니다. 그래서 범죄자에게 회개할 기회를 준다면 제한적이어야 하지 않냐고 묻습니다. 마치 옛날 선지자 요나가 앗수르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생각에 반기를 들었듯이요. “주여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18:21)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베드로의 상식을 한참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18:22) 예수의 대답은 베드로에게 무리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위한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어린아이 같은 로마가 지배하는 제국에서 주변인이요 이방인입니다. 거기에서 경험하는 부당한 압제와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작은 자입니다. 예수께서는 작은 자 베드로에게 거대한 세력을 제압할 방법을 알려주신 겁니다. 라멕처럼 상해를 입었을 때 분노로 갚지 말고, “이에는 이 눈에는 눈” 같은 방식으로 보복하지 말고,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분노나 보복이 아니라 용서를 통해 악한 세상과 그 권력을 전복하라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노의 표현이나 보복행위가 아니라, 용서를 통해 가해자를 응징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제안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자가 용서합니다.(마18:27) 가인 같은 살인자를, 라멕 같이 포악한 자를 불쌍히 여기라고 하십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마18:33)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게 복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오랫동안 가정은 작은 제국이었습니다. 치국(治國)의 전단계가 제가(齊家)였습니다. 가장은 가정이라는 작은 제국을 무력으로 통치하기도 했습니다. 가장의 폭력은 국가의 군대나 경찰이 행사할 수 있는 합법적 폭력으로 용인되기도 했습니다. 가정은 국가 권력 기관도 함부로 개입하지 않는 치외법권지대였습니다. “사랑의 매”라는 모순을 예부터 내려온 진리로 숭상하였습니다. 가정 안에 물리적 폭력과 언어폭력이 허락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폭력을 경험한 어린 아이는 실족합니다. 사랑으로 포장된다 해도 폭력을 경험하는 것은 죄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폭행은 자녀를 실족하게 하는 범죄입니다. 가부장은 작은 자를 실족시키는 죄에서 떠나야 합니다. 자녀는 폭력을 행사했던 부모를 불쌍히 여기고, 개인적으로 대화하고 필요하다면 공개적으로 고발해 가부장에게 저항해야 합니다. 대화도 고발도 다 말입니다. 말로 대화하고 필요하면 고발하되 불쌍히 여기라는 게 하나님의 부탁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폭력에 노출되어 실족했던 “길 잃은 양”을 찾아 구원하십니다. 어린 아이같고 작아서 실족한 우리가 하나님의 어깨 위에 있습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어깨 위에서 사람과 세상을 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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