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믿음의 자리 _ 마2:1~8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20.01.05|조회수127 목록 댓글 0

주현절이 시작되는 주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고 사람들에게 나타나 보이신 것을 기억하는 주현절에, 아기로 오신 예수께서 동방박사들에게 나타나 보이신 사건을 다시 새깁니다. 마태복음 2장 1절부터 8절입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헤롯이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아기를 찾는 동방박사들을 만나 당황합니다. 정통성 없은 권력자였던 헤롯은 별을 관측하며 권력의 향배를 읽는 동방박사들의 질문을 예사로 넘길 수 없습니다. 헤롯이 아는 바 없는 왕의 탄생은 자신의 왕위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었으니까요. 헤롯의 입장에선 왕이 태어나선 안됩니다. 동방박사의 말이 맞다면 왕으로 태어났다는 아기는 죽어야 합니다.

 

 

음흉하게도 동방박사들을 돕는 척 대제사장들과 율법교사들에게 자문을 구합니다.(마2:4) 대제사장들과 율법 교사들은 과연 전문가였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교사들은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했습니다. 예언자 미가를 인용하여 헤롯의 자문 요청에 대한 답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대제사장들과 율법교사들이 헤롯을 위해 봉사합니다.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그 결과 “베들레헴과 그 가까운 온 지역에 사는” 두 살 아래 사내아이들이 학살당합니다. 마태복음 2장 16절입니다.

 

 

Peter Paul Rubens. Massacre of the Innocents, 1611–12 (Art Gallery of Ontario)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는 대제사장과 율법 교사들의 성서 해석을 듣고 헤롯이 두 살 바기 아기들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는 대제사장과 율법교사들의 자문 때문에 베들레헴의 엄마들이 울부짖습니다.(마2:18)

 

 

종교지도자들이 권력의 꼭두각시가 되곤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될 것을 아는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보다 헤롯을 두려워합니다. 권위 있어 보이는 제사장의 치렁치렁한 옷 속에 비굴함이 숨겨져 있습니다. 신학에 정통한 학자의 입술에 독사의 이빨이 가려져 있습니다. 헤롯의 궁전에 있는 종교지도자들에게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있습니다. 엘리트 종교지도자들이 지닌 하나님에 관한 지식 때문에 사람들을 죽기도 합니다.

 

 

지식을 가졌지만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잠언 9장 10절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근본을 두는 것입니다. 지혜는 하나님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지혜는 두 왕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겉보기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같으면서 실상 헤롯을 두려워하는 저들에게 지혜가 있을 리 없습니다. 두길 보기 하는 간교함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지혜가 없는 저들의 해박한 정통 신학을 믿음이라 할 순 없겠습니다. 헤롯 궁전의 종교지도자들처럼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 것, 그 따위 확신을 믿음이라 할 순 없겠습니다. 교리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될 것을 믿는다 해도, 그게 믿음은 아닙니다. 헤롯 궁전에선 종교지도자들의 신학과 확신이 믿음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정통 신학과 교리에 대한 확신만으론 믿음이 아닙니다. 신학과 교리에 지혜를 더해야 믿음입니다. 신학과 교리를 확신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지혜가 나타나야, 믿음입니다. 믿음은 지혜와 만나야 증명됩니다.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하나여야 참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아 권력의 꼭두각시 노릇하는 종교지도자들의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약2:17)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헤롯을 두려워하는 종교지도자들의 신앙은 귀신들의 신앙과 다르지 않습니다.(약2:19)

 

 

헤롯에게도 신앙이 있습니다. 동방박사가 궁전으로 헤롯을 찾아왔을 때, 답을 얻으려고 종교지도자들에게 묻고,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대답을 신뢰합니다. 헤롯이 보통 독실한 게 아닙니다. 종교지도자들을 옆에 두고, 그들의 성서 해석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헤롯도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있습니다. 헤롯도 성서에 기록된 예언이 성취될 것이라 믿습니다. 헤롯이 지닌 믿음의 내용에 하자가 없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도 신앙이 있어, 헤롯이 믿듯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우리에게도 신앙이 있어, 헤롯이 믿듯 성경의 예언이 성취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네 믿음의 내용에 큰 하자가 없습니다. 헤롯의 믿음처럼, 우리의 믿음에 큰 하자가 없습니다.

 

 

내용상, 헤롯의 믿음에 큰 하자가 없다면 고민됩니다. 헤롯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리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그 내용만으로 충분한 게 아닌 거지요. 내용만으로 확인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의 내용이 왜 중요하지 않겠습니까마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믿음의 자리입니다.

 

 

궁전은 믿음의 자리가 아닙니다. 헤롯이 권좌에 앉아있는 궁전은 믿음의 자리가 아닙니다. 제 아무리 대제사장이요 율법 교사라도 헤롯의 궁전에선 그 믿음이 증명되지 않습니다. 수익을 얻기 위해 종교지도자들이 일하는 성전도 믿음의 자리가 아닙니다. 고기 가마 곁은 믿음의 자리가 아닙니다. 헤롯의 눈치를 살피는 궁전이 아니라 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광야가 믿음의 자리입니다. 제물을 팔아 종교 사업을 벌이는 성전이 아니라 성령께서 불로 세례를 베푸실 다락방이 믿음의 자리입니다. 따뜻하고 배부른 노예가 누워있는 고기 가마가 아니라 끝나지 않는 겨울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곁이 믿음의 자리입니다.

 

 

믿음은 궁전과 성전에서 발견되지 않습니다. 궁전과 성전에선 믿음이 열매 맺지 못합니다. 궁전과 성전이 무너진 자리에서 믿음은 열매 맺을 수 있습니다. 궁전과 성전이 하나님의 곡괭이에 찍혀 가루가 되어야 그 땅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결실하는 좋은 땅 됩니다. 궁전과 성전은 길가, 가시떨기, 돌밭 같은 땅이라, 어떤 믿음도 열매 맺지 못합니다. 믿음은 그 내용으로 인정받는 게 아닙니다. 믿음의 자리를 살펴야 합니다. 믿음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만 증명됩니다.

 

 

사람들이 예수가 그리스도인지 확인하기 위해 첫 번째 던진 질문이 자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35절부터 39절입니다.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요한이 말한 대로 예수가 과연 “하나님의 어린 양”인지 확인하기 위해 이렇게 묻습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누구인지, 무엇을 할 것인지 묻기 전에 어디에 있는지 묻습니다. 예수가 궁전이나 성전에서 묵고 있었다면, 제자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궁전이나 성전은 믿음의 자리가 아닙니다. 궁전이 아니라 광야가 믿음의 자리입니다. 성전이 아니라 다락방이 믿음의 자리입니다.

 

 

요한은 성전을 거부하고 광야에서 세례를 베풀다가, 동시에 궁전을 거부하고 헤롯을 비판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예수는 제국에서 천국을 가르치다가 십자가에서 처형됐습니다. 믿음의 자리는 광야와 감옥과 십자가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만큼 세상이 창조되기까지 믿음의 자리를 지킨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국을 꿈꾸며, 천국을 열기 위해 말하고 일하다가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죽기도 했습니다. 봉건국가의 무능하고 잔인한 왕에게 저항하며 새로은 세상을 향한 신앙을 가졌던 수만 명의 사람들이 칼에 맞거나 감옥에 갇혀 죽었습니다. 일본 제국 강점기에 해방 세상을 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다쳤고, 갇혔고, 죽었습니다. 독재에 저항하며 길에 나섰던 사람들 역시 다쳤고, 갇혔고, 죽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 흘린 땅 위에서 우리가 이만큼 천국에 근접한 세상을 삽니다.

 

 

완전하진 않습니다. 완전한 하나님나라를 아직 맞이하진 않았습니다. 완전한 천국에 더 근접하기 위해 대륙으로 길이 나야겠습니다. 바다엔 핵항공모함이 없어야겠구요. 절차 민주주의는 완성되어야 하고, 생활 민주주의는 뿌리내려야겠습니다. 부자와 빈자의 간격은 줄고, 기회는 평등해야겠습니다. 혐오와 배제대신 용서와 포용이 넘쳐야겠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면, 다른 것들은 다 채워질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면, 다른 사람들도 더 행복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믿음의 자리인 광야와 감옥을 살았던 사람들의 자취를 따라갑니다. 예수를 따라갑니다. 2천년 전 요한처럼 예수처럼 살아냈던 동시대인들도 있습니다. 신앙은 달라도 믿음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서야 할 믿음의 자리에 먼저 서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연대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두를 믿음의 자리로 초대하십니다. 믿음의 자리에서만 믿음이 증명됩니다.

 

 

믿음의 자리에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