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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소 _ 마3:1~17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20.01.12|조회수231 목록 댓글 0

제사장이 제물을 가지고 성전 지성소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려야 대속(代贖)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모세의 가르침이었고, 그래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라는 사람이 요단강에 나타나서는 물로 죄를 씻어주었습니다. 죄가 씻어지는 조건은 ‘회개’였습니다. 죄를 뉘우치고 죄에서 떠나 회개하면 된다 하였습니다. 뭇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몰려들어 ‘돈 없이 값없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았습니다.(사55:1)



베로키오, <세례받는 그리스도>, 1472~75년, 우피치미술관

 

성전이 아니라 강에서 예식을 치르고, 제물이 아니라 물로 깨끗해진다는 혁명적인 가르침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을 보고 종교지도자들이 깜짝 놀랍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같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보기에 세례 요한의 선포와 행위는 이단적인 것이었습니다. 아니 이단이어야 했습니다.

 

요단강에서 물 뒤집어쓰고 죄가 사라져버린다면 사람들이 돈을 들고 성전에 올 필요가 없고, 그리되면 성전의 수입원이 말라 버릴 것이기 때문에 세례 요한의 선포는 이단이 되어야 했습니다. 세례 요한을 이단의 괴수로 몰아붙여야만 돈과 사람들을 다시 성전으로 불러들일 수 있으니까요.

 

이단 심문관의 위엄을 갖추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요단강으로 출두했습니다. 요단강에서 ‘낙타털 옷’을 입고 선지자 노릇하는 이단의 수괴에게 본때를 보여줄 참입니다. 그런데 심문하겠다고 나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오히려 세례 요한에게 ‘독사의 족속들’이라 불리며 심문을 당합니다.

 

“이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올 그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은 나무는 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마3:7~10) 이단 심문관 행세하려던 종교지도자들이 오히려 세례 요한에게 섬뜩한 설교를 들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거침없는 세례 요한이 딱 한 사람 예수를 말하며 한 없이 겸손해집니다. 세례 요한 자신은 예수님의 신을 들 수도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기를 ‘불로 세례를 베푸는 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볼 때 이단적 의례를 주관하고 종교지도자들을 꾸짖는 요한에게 예수께서 오십니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세례는 이단적 의례가 아닌 겁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요한의 편을 들어주십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물 밖으로 나오는 순간 성령께서 예수의 위로 오셨습니다.(마3:16) 물세례뿐만 아니라, 불세례까지 받으신 겁니다.  

 

물로 세례를 베풀자면 강이라는 특정 장소와 물이라는 재료가 필요합니다. 불로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푼다는 것을 뜻하는데, 성령 세례는 장소를 가리지 않을 뿐더러 물이라는 최소한의 재료마저 필요 없습니다. 아무런 종교적 상징물 없이도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죄를 깨끗하게 태워버릴 수 있는 분이라 고백한 거지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장차 구원이 유대 땅 너머의 이방인들에게도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고백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한정되었던 거룩한 공간이 세례 요한에 의해 요단강으로 확장되었고, 이제 예수님에 의해 유대 땅 너머까지 넓혀질 것입니다.

 

제한된 구역으로서의 성역은 없습니다. 온 세상과 모든 땅이 성역입니다. 옛날 야곱은 돌을 베고 노숙하던 곳을 성역이라 고백했습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28:16~17)

 

성역이란 하나님께서 계신 공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만 계시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을 벽돌 건물 안에 연금시킬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에 계십니다. 그래서 나그네가 노숙하는 길도 거룩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돌을 베고 자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습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지요.

 

풍찬노숙(風餐露宿)하는 길도 ‘하나님의 집’입니다. 돌을 베고 자는 자리라도 하나님이 계시면 거기가 성역이요 하나님의 집입니다. 예루살렘 성전만 거룩한 공간일리 없고, 유대땅 안쪽으로만 거룩한 땅일 리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어 세상 어디에 사는 누구라도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보이셨습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며 예루살렘 성전 너머에도 지성소가 있음을 선포했고, 예수님께서는 불로 세례를 베풀며 온 세상을 지성소처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고, 예수님은 요한의 길을 확장하셨습니다. 

 

우리 가족이 머무는 집이 지성소입니다. 내가 일하는 직장이 지성소입니다.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 파는 마트가 지성소입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어디에나 계시는 이가 하나님입니다. 성전에도 광야에도 유대땅에도 땅끝에도 하나님이 계십니다.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요,(잠9:10)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십니다. 모든 공간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죄’에 매이지 않아, 진실로 자유를 누립니다.

 

마음을 여미는 예배당도 지성소이고, 마음 졸이며 일하는 직장도 지성소이고, 마음을 풀고 쉬는 가정도 지성소이며, 마음을 잃어버린 길도 지성소입니다. 어디에나 하나님께서 계시며, 하나님께서 계시는 모든 곳이 지성소입니다. 지성소에서 매순간 불로 세례를 받습니다. 불로 세례를 베푸시며 나를 단련하십니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하게 창조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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