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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생각 _ 고전15:35~38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20.04.19|조회수71 목록 댓글 0

에베소에 있을 때, 바울은 경기장에 끌려가 맹수와 더불어 싸울지 모르는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고전15:32) 언제든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황제가 그리스도라 여겨지던 시대여서,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사람들은 체제에 위협적이라, 제국은 그리스도인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공적인 공간에서 처형해야 본보기가 될 테니까, 경기장에서 맹수와 시합 붙여 기독인을 죽이곤 했습니다.

 

천국은, 당시 제국에서 위험한 생각이었습니다. 기독인은 위험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위험한 생각을 하지만, 기독인은 그 위험한 생각을 폭력적인 방법으로 실현하려하지 않습니다. 위험한 생각을 하지만 기독인은 그 위험한 생각을 과격한 언사로 풀지 않습니다. 기독인은 온유와 겸손으로 위험한 생각을 표현합니다. 기독인은 공감과 희생으로 위험한 생각을 실현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기독인은 체제를 수호하려는 보수주의자들에게도 공격받았고, 체제를 변혁하려는 진보주의자들에게도 비난받았습니다. 보수주의자들이 체제를 지키는 방식도 폭력으로 억압하는 것이었고, 진보주의자들이 체제를 변혁하는 방식도 폭력으로 깨뜨리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변질되지 않은 기독인은 공격받거나 비난받기 십상입니다.

 

전제군주국이었던 세상이, 이제 민주공화국이 되어 기독인이 품는 천국생각 때문에 공격받진 않습니다. 다양한 사상과 가치가 존중받는 시대여서 기독인이 품는 천국생각이 비현실적이라고 비난받지도 않습니다. 신앙생활하기 좋은 시절입니다. 그래서인지, 생명의 위협을 마주한 채 부활을 소개하는 성경이야기가 실감나게 들리지 않습니다. 교리문답을 받으며 사도신경을 외우며 부활을 믿는다 고백하지만, 사후세계에 대한 보험증권 수준으로 받아들입니다.

 

개탄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감사합니다. 부활교리가 가슴을 뛰게 하는 시대로 돌아가고 싶진 않습니다. 기독인이기 때문에, 목사라는 이유로 공설운동장에 끌려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개처형을 당할 수 있기에, 부활을 믿으며 끝까지 내 신앙을 지키는 인생, 그런 인생이어야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시대로 나는 돌아가고 싶진 않습니다. 부활에 관한 교리를 밋밋하고 어쩌면 무감동하게 고백해도 되는, 시대를 살고 있어 감사합니다. 사후세계에 대한 보험증권 같은 내 믿음의 수준은 대단치 않지만, 이만큼 진보한 세상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역사는 위대합니다. 이만큼 진보한 세상이 되도록 헌신한 선조와 선배들께 감사합니다.

 

보험증권 같은 부활이라, 우리 시대에 부활신앙은 별거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은 옛날 바울과 기독인들만큼 치열하지 않고, 목사로서 바울의 삶을 따라가지 못하면서, 바울의 말을 인용하며 설교하는 것도 우습지만, 이런 우리 형편과 수준을 나는 받아들이겠습니다. 다행스럽게 여기겠습니다. 감사하겠습니다.

 

지금 너무 힘들다고 아직은 한숨 쉬지 않겠습니다. 코로나19바이러스로 인한 의료적 위기가 지나가면 쓰나미 같은 경제적 위기가 올 것이라고 예상들 하고, 이미 지금 경제 위기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도 위기와 고통에 공감하겠다는 건물주의 호의를 받아 임대료를 돌려받기도 했고, 돌려받은 임대료를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이웃과 나누기도 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때 교회와 목사의 살림살이를 걱정해주는 사람들 있어 고마우면서도, 우리가 정말 어려운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누우면 하늘 가려주는 천장이 있고, 솥단지에 넣을 쌀이 있고, 비싸진 않지만 살찐 몸을 가릴 옷이 있습니다.



엘 그레코(El Greco), 부활(The Resurrection), c.1597, 프라도



그래도 지금은 분명 비상한 시기인 건 틀림없습니다. 해서, 내가 가진 보험증권의 약관을 꼼꼼히 읽어봅니다. 형식적으로 동의하며 서명하고 쳐 박아둔 보험증권 약관 같은 성경을 다시 살펴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보내는 편지에서 부활에 관해 이렇게 썼네요.

 

47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15:47)

 

부활은 흙에 속하지 않고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흙에 뿌리를 내리지만 줄기와 가지를 하늘로 향하는 나무처럼 되는 게 부활입니다. 중력이 당기는 곳으로 뿌리를 내리지 않을 수 없지만, 중력을 거슬러 몸을 하늘 쪽으로 곧추세우고 손을 하늘 속으로 담그며 사는 게 부활입니다.

 

나무는 본디 씨알이었습니다. 씨알이 어두운 흙속에 죽어서 전혀 다른 모양의 나무로 변합니다. 바울은 죽은 후 부활한 사람의 몸을 씨알이 죽은 후 나무가 되는 것에 비유합니다.

 

35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멩이 뿐이로되 38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전15:35~38)

 

부활은 씨알이 죽어 나무로 변화되는 것과 같습니다. 씨알이 죽어 나무로 변화되듯, 사람의 육신도 죽어 변화되는데 육신과 전혀 다른 몸으로 변화되는 것이 부활입니다.

 

이런 부활이 있는 줄 믿어 바울은 제국 복판에서 천국을 전했고, 교회는 바울의 말을 따라 천국을 생각했습니다. 부활은 죽은 후 보장이 확실한 보험증권의 약관이라고 믿었고, 나아가,

 

바울은 멋진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죽은 후 보장된 부활뿐만 아니라, 죽기 전에도 바울은 날마다 죽어서, 자신의 일생을 부활로 채웁니다. 바울은 제국에 뿌리내리지만 천국으로 줄기와 가지를 벋는 나무처럼 살았습니다. 죽기 전에도 부활을 살았습니다. 바울과 교회에게 부활은 죽은 뒤 효력이 발생되는 보험증권의 약관 일뿐만 아니라 지금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죽은 후 효력이 발생된다는 보험증권 같은 부활에 관해 얼마든지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인류가 그간 쌓아온 말의 더미에서 조금씩 추려내고 인용해서 말하는 것 공부하면 어렵지 않습니다. 2천년 동안 꾸준히 팔려온 보험상품이라 그 약관이 섬세하고 정밀하기 짝이 없어서 말할 게 너무 많습니다. 심지어 예수의 부활을 역사적으로 논증 할 수 있다는 게 신학자들의 업적입니다. 그러나,

 

천국을 생각해도 안전한 요즈음, 죽기 전에 살아내는 부활에 대해 나는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바울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하며 말할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평범한 소시민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며, 민망할만큼 손은 게으르고, 부당하게 자식들에게 소리 지르는 주제에 부활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멋진 말로 가르치기 위해 읽고 쓰며, 낮은 자리에서 선교하는 사람들을 후원하는 수준의 삶으로 부활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나를 죽이지 못하고 날마다 안전한 나는 부활의 삶을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나를 개탄스러워하진 않습니다. 대단치 않은 나를 한심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선언하며 살아야 했던 바울처럼, 그런 바울처럼 비장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과 선조와 선배들에게 감사하며 살아보겠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길에서 나도 바울이 부활한 예수를 만났던 것처럼, 이전과 또 차원이 다른 부활을 깨닫는다면, 그 땐 부활의 삶을 말할 자격이 있을까요.

 

날마다 안전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날마다 마스크를 챙기고 사회적 거리두기에 참여하며 코로나19바이러스와 싸웁니다. 2020년 부활절을 맞은 오늘까지 코로나19바이러스 때문에 전 세계에 걸쳐 10만여 명이 죽었습니다. 인류 전체에 비범한 일상이 찾아온 게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 부활은,

 

다시 평범한 일상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었던 특별하지도 않고 위험하지 않았던 평범한 일상은, 옛날 바울이 상상했던 천국보다 더 천국에 근접한 것이었습니다.

 

10만에 달하는 지구촌 사람들의 죽음과 함께 부활절을 맞습니다. 헨델의 메시아를 들으며 할렐루야를 외칠 수 없는 부활절입니다. , 나흘 뒤엔 세월호 참사 6주기입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부활절을 기념하기엔 역사와 현실이 너무 아픕니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가족과 격리된 채 죽음을 맞는 건 일상이 아닙니다. 자식이 수학여행 가는 배 안에서 서서히 죽어갔다는 생각을 평생 잊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하루하루는 일상이 아닙니다. 부활은 일상을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다시 일상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은, 그래서 어떤 이에겐 불가능하고, 그래서 부활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죽은 후 효력이 발생하는 보험증권의 약관에 대해 겨우 설명할 수 있을 뿐, ‘날마다 안전한김목사는 부활을 모릅니다. 코로나19바이러스가 창궐한 2020년에, 세월호참사가 있었던 2014년 때처럼 김목사는 부활을 말할 줄 모릅니다. 오늘 부활을 증명하는 건 하나님의 일입니다. 오늘 허망한 제 설교를 기억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반추하며 부활을 이해하시길 권합니다.

 


병들고 아픈 모든 사람들이 평범한 일상을 다시 살게 하소서. 부활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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