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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와 현실 _레23:22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20.04.19|조회수388 목록 댓글 0

기대와 현실 _ 김영준 목사

 

전 세계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하게 될 거라고 합니다. 코로나19바이러스가 온 세상에 퍼지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 국가와 국가 간 활동이 위축되었기 때문입니다. 쓰나미 같은 경제 위기가 올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합니다.

 

경제 위기는 늘 있었습니다. 옛날 사사 시대에()... 기근이...있었습니다.(1:1) 배고픈 사람들은 기근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서기도 했습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 가정도 그랬습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 가정에 말론과 기룐이라는 아들들이 있었는데, 말론이라는 이름은 질병이란 뜻이고, 기룐이라는 이름은 황폐란 뜻입니다. 자식들의 이름을 질병과 황폐라고 일부러 짓진 않았겠지요. 가정이 처했던 상황에 대한 은유입니다. 기근을 극복하기 위해 떠나간 땅도 황폐했고, 병까지 얻어 엘리멜렉도 죽고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 나오미는 모든 것을 잃은 것입니다.(1:2~5) 모든 것을 잃은 나오미의 이름 뜻이 기쁨입니다.


남편과 아들들을 잃은 나오미는 며느리 룻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고향 사람들에게 나오미가 인사합니다.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들 마십시오.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몹시도 괴롭게 하였으니, 이제는 나를 마라라고 부르십시오(1:20) ‘마라의 뜻은 괴로움입니다.

 

이름을 지을 땐, 기대를 담습니다. ‘기쁨이라는 뜻을 가진 나오미라는 이름에도 기대와 이상이 담겨있었겠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남편을 잃었고, 자식마저 잃었습니다. 나오미의 현실은 기대와 달리 괴로움이었습니다.

 

나오미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얻은 것도 있었습니다. 당찬 며느리 룻과 함께였습니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나서며 한 말입니다.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어머님과 나를 떼어놓기 전에 내가 어머님을 떠난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더 내리신다 하여도 달게 받겠습니다.(1:18) 룻이 나오미와 함께 합니다. 남편과 자식을 잃은 나오미의 현실은 괴로움으로 가득했지만, 룻이 함께 하는 기쁨이 아직 남았겠습니다.

 

기대와 현실 사이, 어디쯤에 살아갑니다. 나오미는 기쁨괴로움사이, 어디쯤에 살았습니다. 나오미 뿐만 아니라 사람은 기쁨과 괴로움 사이, 기대와 현실 사이 어디쯤에 살지 싶습니다.

 

지난 41521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습니다. 더 나은 정치에 대한 기대와 정치로 다 해결할 수 없는 현실 사이 어디쯤에 우리가 있습니다. 국회의원선거일 다음 날은 세월호 참사 6주기였습니다. 세월호 참사에 관한 진상이 낱낱이 드러나길 기대합니다. 진상 규명과 별도로 어린 죽음을 껴안고 살아야하는 가족들의 고통은 끝나지 않을 현실입니다. 기대와 현실 사이 어디쯤에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419혁명 60주년 기념일입니다. 60년 전 민주 혁명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민주 사회에 대한 기대와 군사 쿠데타의 현실 사이를 살아왔습니다. 정치 영역에서 이루어진 민주화에 더해, 이제는 경제 영역에서 다져야 할 민주화 숙제가 남아있습니다. , 장애인, 난민 등 소수자들에겐 다수가 주도하는 민주화가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기대와 현실 사이 어디쯤에 우리가 있습니다.

 

기쁨이라는 기대와 괴로움이라는 현실 사이에 있었던 나오미처럼, 그래서 자신을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하는 나오미처럼, 기대와 현실 사이를 살아갑니다. 괴로운 현실을 사는 나오미에게 여전히 기대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너희가 밭에서 난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에는, 밭 구석구석까지 다 거두어들이지 말고, 또 거두어들인 다음에,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라, 그 이삭은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 신세인 외국 사람들이 줍게 남겨두어야 한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_레위기23:22

 

남편도 죽었고, 아들도 잃어버려 며느리와 함께 과부된 나오미에게 하나님의 법이 남아있습니다. 사유재산에 관한 하나님의 법이 가난한 과부 나오미를 위해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밭의 주인이라도 밭모퉁이에서 난 곡식을 소유할 순 없습니다. 밭의 주인이라도 밭에 떨어진 이삭까지 소유할 순 없습니다. 밭모퉁이에서 난 곡식과 걷이하며 떨어진 이삭은 밭주인의 것이 아닙니다. 밭모퉁이에서 난 곡식과 걷이하며 떨어진 이삭은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의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 나오미의 것입니다.

 

내 것 중의 일부는 내 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의 것이라는 게 하나님의 법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있는 까닭에 엄혹한 현실을 맞이한 나오미도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기대를 갖습니다. 여기 지평선에 갇혀 괴로운 현실을 살지만 지평선 너머 저기를 기대하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이 있어야 괴로운 현실을 사는 사람도 기쁨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바이러스 때문에 쓰나미같은 경제 위기가 현실이 된다면, 하나님의 법으로만 위태한 사람들이 살 수 있습니다. 땅을 가진 사람들이 지닌 사유재산의 일부는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의 것입니다. 걷이하며 떨어진 이삭은 땅 주인의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밭모퉁이에 대한 소유권과 떨어진 이삭에 대한 사용권이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에게 있는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저기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보내는 연보를 받습니다. 지난주엔 구제헌금으로 써달라고 50만원의 연보를 부탁받았습니다. 코로나19 때문에 수입이 끊긴 가정에 전달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법을 실천합니다. 보아스도 그랬습니다. 스스로를 괴로운 사람이라 칭하며 마라라고 불러달라는 나오미를 위해, 밭에 온 며느리 룻을 위해, 보아스가 하나님의 법을 실천합니다.

 

룻이 이삭을 주우러 가려고 일어서자, 보아스가 젊은 남자 일꾼들에게 일렀다. “저 여인이 이삭을 주울 때에는 곡식단 사이에서도 줍도록 하게. 자네들은 저 여인을 괴롭히지 말게. 그를 나무라지 말고, 오히려 단에서 조금씩 이삭을 뽑아 흘려서, 그 여인이 줍도록 해주게.” _ 2:15~16

 

하나님의 법은 따뜻합니다. 법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필요합니다. 부유한 사람들에겐 꼭 법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법이 아니라 돈으로 많은 문제를 풀 수 있으니까요. 나오미와 룻처럼 여성, 과부, 나그네, 가난한 사람들에겐 반드시 법이 필요합니다. ()을 파자하면 물()이 가는() 것입니다. 법은 물처럼 아래로 흘러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여성에게, 과부에게, 나그네에게 물처럼() 아래로 흘러가야() ()입니다.

 

선거로 입법기관에서 일할 사람들을 뽑았습니다. 21대 국회를 기대합니다. 따뜻한 법을 만들기를 기대합니다. 기대한대로 현실이 되진 않을 것입니다. 마냥 낙관하지도 않고, 하냥 비관하지도 않습니다. 현실과 기대 사이에 있을 것입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기대를 담아 기도하겠습니다. 현실과 기대 사이에서 괴로움과 기쁨 사이에서,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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