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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구니와 종이배 _ 출1:15~2:10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20.05.03|조회수171 목록 댓글 0

바구니와 종이배


김영준 목사, 민들레교회

 


부모가 자식을 그럭저럭 돌볼 수 있는 시간은 영유아기일 겁니다. 걸을 수 없고, 숟가락질 할 수 없는 영유아기를 지나, 스스로 걷게 되고 먹을 수 있게 되면서부터 아이는 자주 다치고 사고 위험도 높아집니다. 아빠 어깨와 엄마 품 밖에서 걷고 먹는 것 자체가 위험합니다. 유치원만 가도 아이는 크고 작은 스트레스를 경험합니다. 부모와 아이가 다른 시공간에 놓이게 되면서 부모는 아이의 마음과 생각마저 지켜주기 어려워집니다. 부모가 자식을 책임지지 못합니다. 아무리 좋은 부모라도 자식을 끝까지 돌볼 수 없습니다.

 

이별의 아픔을 겪는 가족은 더 그렇습니다. 부모님들이 일찍 돌아가시기도 하니까요. 아무리 사랑이 큰 부모라도 돌아가시거나 헤어지게 되면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생존해 옆에 있어도 부모의 역량은 충분하지 않은데, 부재하다면 말해 뭐합니까. 언제든 죽을 수 있기에, 어느 때부턴 자연스레 무책임하고 무능한 부모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 사람들은 갓난 아이 마저 지킬 수 없었습니다. 파라오가 히브리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남자 아이를 죽이라 명했기 때문입니다.(1:15,22) 지혜로운 산파들이 있어 살아남은 생명들이 있었지만,(1:17) 파라오는 집요했고 잔인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아들을 낳으면 나일강에 던지라는 칙령을 내린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히브리 사람들은 갓 태어난 아이를 버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부모는 아이를 버리기도 합니다.



푸생, 모세를 나일강으로 흘려보내다, 1654, 캔버스유화, Ashmolean Museum, 149.5cm×204.5cm

 


석 달 동안 파라오의 칙령을 무시했던 가족이 있었습니다. 더 이상 아이를 책임질 수 없어 바구니에 아이를 담아 나일 강에 띄워 보냈습니다. ‘역청과 나무 진을 발라 바구니에 물이 들지 않도록 했지만, 물결에 흔들리다 보면 작은 틈새로 물이 들어올 것입니다. 또 나일 강엔 악어가 많아서 이집트 사람들은 악어를 신으로 여겼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나일강을 오르 내릴 때 세베크(Sebek)라는 악어 머리신에게 기도했습니다. 나일 강에 악어가 흔했기 때문입니다. ‘역청과 나무 진이 물방울을 막을 순 있지만 악어 이빨을 견딜 순 없습니다. 아이가 탄 바구니는 안전하지 않습니다.(2:1~3) 부모가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석달 된 아이를 나일강으로 흘려보낼 때 준비하는 바구니 같은 것입니다.




Alma-Tadema, The Finding of Moses 모세를 발견하다, 1904, 136.7×213.4cm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구니를 끌어가셨습니다. 목욕하러 나온 이집트 공주 앞으로 바구니를 끌어다 놓으셨습니다. 홍수 중에 방주로 노아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바구니로 모세를 나일 강에서 구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바구니가 방주됩니다. 방주 같은 바구니가 이집트 공주 앞에 닻을 내렸고, 히브리 노예의 아들을 이집트 공주가 맡아 키웁니다.(2:5) 이집트 공주는 아이의 친모를 유모로 고용하구요. 이렇게 자란 아이가 모세였습니다.

 

부모가 할 수 있는 건 나일강에 아이를 태워 보내며 바구니를 준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부모의 최선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구니는 아이를 위해 충분한 게 아닙니다. 사실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어느 순간 바구니는 스며들어오는 물을 막을 수 없을 것이고, 물이 스미기 전에 악어 신 세베크에게 으깨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크지만 부모는 무능하고 무력해서 자식을 위해 바구니 이상을 준비하지 못합니다. 마음 이상을 표시할 수 없는 바구니가 부모가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시차가 있을 뿐 부모는 언젠가 자식을 떠나야 합니다. 자식을 떠나지 않고 오래 산다 해도 부모는 자식을 완전히 보호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때가되면 자식의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치사랑은 내리사랑보다 크지 않습니다. 부모의 내리사랑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게 바구니라면, 자식의 치사랑으로 만들 수 있는 건 빤합니다. 자식이 부모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예의와 염치로 접은 종이배 같은 것입니다. 종이배 같은 자식의 보호와 사랑을 부모는 유람선처럼 받습니다. 자식의 위태한 선물을 부모는 위대한 사랑으로 받습니다.

 

새벽잠 많던 십대 시절, 어두운 시간에 깬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3형제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시며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데, 아직 어두운 새벽에 무릎 꿇고 기도하시던 어머니 작고 둥근 허리가 생각납니다. 어머니께선 세 아들을 위해 만들 수 있는 최선의 결과물이 나일 강에 띄운 바구니라는 걸 알고 계셨습니다. 바구니가 방주가 되길 기도하셨습니다. 방주가 된 바구니는 나일 강을 타고 여기 김포에 닻을 내렸습니다. 저도 십대 아이 둘의 아비가 되었습니다.

 

어린이 주일 아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파라오의 위협 앞에 무능한 아비여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이들의 필요를 다 채워줄 수 없는 가난한 아비여서 복 주시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어쩌면 생각보다 일찍 무너질 수 있는 몸이어서 영존하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아비가 먼저 살아보지 못한 세상이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이들이 아비의 믿음보다 갑절의 믿음으로 살아가길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부모가 만든 바구니가 방주 되게 하소서. 창일하는 나일 강에 침몰하지 않고 세베크의 악어 이빨도 견딜 수 있는 방주 같은 바구니 되게 하소서. 역청과 나무진을 바르듯, 우리가 하는 모든 노력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담게 하소서. 우리가 아이들을 위해 만든 바구니가 가야할 곳으로 흘러가게 하시고, 닿아야 할 곳에 멈추게 하소서. 멈춰 서서 뿌리 내린 곳에 다시 바람이 불거든, ‘푸른 돛올리고 다시 길 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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