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닫힌 현실 열린 광야 _ 마10:28~31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20.05.24|조회수108 목록 댓글 0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등교했고, 첫 번째 모의고사를 치렀습니다. 십대 청소년들이 스스로 인생의 매듭을 짓는 시간이 시작됐습니다. 점수의 크기가 존재의 크기는 아닙니다. 점수의 크기가 인생의 크기도 아닙니다. 시험 성적을 참고하되, 지금 모르는 것을 확인하고 자기를 더 알아가는 과정으로 승화되길 기도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 역시, 미처 매지 못한 매듭 더 짱짱하고 곱게 짓기를 기도합니다.


 

일할 기회를 갖지 못한 청년들을 만납니다. 열심히 일을 하다가 쉬어 가는 이도 있고, 새로운 모색을 했다가 벽에 부딪친 이도 있습니다. 쉬는 중에 불안하지 않고, 모색하는 중에 좌절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깊게 파려면 넓게 파야한다고 합니다. 쉼과 모색은 전공과 경력 이상의 견문을 넓히는 시간되길 기도합니다.

 

국경을 넘어 온 나그네들이 낯선 언어, 익숙하지 않은 문화 속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나그네들이 한국을 배우듯, 한국인은 나드네들의 말과 역사를 배우면 좋겠습니다. 나그네들이 한국문화에 적응하듯, 한국인은 나그네들의 문화를 존중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친구가 되고, 나그네들 덕분에 우리가 더 풍성해지는 걸 경험하게 될 겁니다. 21일 목요일엔 미얀마 북쪽에 사는 카친족 관련 기사를 함께 읽고, 한국에 오신 카친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매월 세 번째 목요일엔 난민을 위해 기도합니다.

 

장애인이 편안하게 찾을만한 모임이 적습니다. 지난주에 발달장애인 청년이 예배에 오려고 1030분에 카페에 왔는데 문이 잠겨 있어 돌아갔나 봅니다. 1130분이라고 여러 번 알려줬지만, 잊어버리기도 했겠고, 보통 1시간 전이면 열려있을 거라 생각했겠습니다. 정해진 시간이 발달장애인 청년에겐 장애물이 될 수 있겠네요. 우리 모임에 오는 길목에 장애물들을 하나씩 줄여나가야겠습니다. 적어도 모이기 1시간 전에는 문을 열어둬야겠습니다. 발달장애인 청년들의 모임이 다양해지고 많아지길 기도합니다.

 

코로나19바이러스 때문에 휴직하는 경우도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경제활동을 못하게 됐습니다. 먹고 사는 거 항상 쉽지 않았지만, 요샌 요새대로 힘듭니다. 휴직하는 시간, 옛날 창조의 완성이었던 안식으로 경험되면 좋겠습니다. 이참에 일하는 시간에 관계없이 일하는 사람 혹은 일하고 싶은 사람 모두가 한 데나리온을 받는 세상으로 변혁되면 좋겠습니다.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깊어지고 현실 속에 안착되길 기도합니다.


청년의 아버지께서 귀천하셨고, 집사님의 어머니께서 오래 아프십니다. 중년이 되니 여기저기 조금씩 아픕니다. 병들어 아프고, 아프다가 죽습니다. 아프지 않아도 죽음은 늘 가까이에 있습니다. 죽음을 잊지 않아야 오늘 익숙한 일상이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먹고 입고 자는 일상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먹고 입고 자는 그 평범한 일상을 함께하는 가족들과 이웃들을 소중히 사랑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김목사는 어지럼증이 생겼습니다. 지난 설날에도 심하게 어지러웠는데, 엊그제부터 조금씩 어지럽더니 토요일엔 종일 누워있었습니다. 본래 지구가 도는 줄 알고 있었지만 사각형 거실도 도네요. 놀이기구에 올라타 있는 거 같아 초점을 맞춰 집중하기가 어렵습니다. 주제를 정해 설교할 수 없어 그냥 우리 교회 식구들 한 명 한 명 이름을 새기며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한 명 한 명 이름을 새기며 생각하실 거라 믿습니다. 27일 수요일에 시청 위생과에서 가서 카페 영업신고를 다시 하고, 세무서에서 사업자 등록을 하려고 합니다. 가끔 모르는 사람이 그냥 부르기 좋은 호칭으로 저를 사장님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제가 사장이 되게 생겼습니다. 해보려고 합니다. 커피보다 책을 다루는 사장이 될 거 같아요. 20111225일 민들레교회를 시작하고 9년이 차갑니다. 공간도 사업도 현장도 사람도 계속 변했습니다. 변화에 또 한 번 변화를 맞게 되서 일까요, 어지럽습니다.

 

28일 목요일엔 신영복 선생이 소개하는 논어를 공부하려구요. 한문을 풀어야 해서, 제가 오랜만에 칠판에 판서하면서 논어 몇 구절을 소개하며 대화하겠습니다. 김목사가 논어 전문가는 아니지만, 동양고전 읽기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구절과 통하는 성경도 나누겠습니다. 예수께서 모세오경을 재해석해서 산상수훈을 남기셨듯이, 동양고전을 재해석해서 우리 시대 우리 세대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걱정됩니다. 십대 청소년도 이삼십대 청년도 중장년도 모두들 걱정합니다. 김목사도 걱정합니다. 걱정하는 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이기도 하고, 내일까지 해결하려는 교만이기도 합니다. 걱정하는 사람이 열매맺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불신하는 사람에게 교만한 사람에게 열매 맺힐 리 없지요.



미켈란젤로,십자가형을 당하는 베드로,1542~45,625*662cm,바티칸 파올리나성당



두려움은 걱정과 다릅니다. 두려움은 뜻을 찾아 길을 가는 자에게 찾아오는 숭고한 감정입니다. 모세가 히브리 사람들과 함께 광야로 나서야 할 때 두려웠습니다. 여호수아가 모세 없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할 때 두려웠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할 때 두려웠습니다. 베드로가 죽음을 감수하고 로마에 남아야 할 때 두려웠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와 베드로와 예수께서 품었던 두려움은 숭고한 감정이었습니다. 이집트 파라오와 맞짱떴던 모세의 두려움을, 60만에 이르는 사람들의 지도자가 되어 땅을 정복하고 정복한 땅을 균등하게 분배해야 하는 여호수아의 두려움을, 참 메시아가 어떤 존재인지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알려주셨던 예수의 두려움을, 그 예수를 따라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은 베드로의 두려움을, 우리가 갖는 걱정과 비교할 순 없습니다. 걱정의 원인은 불신과 교만이지만, 두려움의 원인은 연민과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따라보겠다고 애달캐달해야 두려움을 갖는 겁니다.

 

하나님은 불신과 교만에서 비롯된 걱정뿐 아니라, 연민과 순종에서 자란 두려움마저 버리라고 하십니다. 길을 나서는 모든 사람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두려움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은 두려움을 스스로 극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건, 다시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제안입니다. 숭고하기 보다 약해지라고 하십니다. 약한 까닭에 하나님께 의존하는 사람되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이 두려움을 갖는 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겠다는 장한 결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장한 결정을 내렸거든 결정한대로 살아낼 수 있는지 계산해봐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라도 완전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낼 수 없습니다. 계산이 끝났거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으면 스스로 지닌 숭고함을 관리하지 못해 파국에 이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두려움을 지속적으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두려움을 품은 사람의 장기는 녹아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입시를 앞두고 걱정하고, 진로를 알 수 없어 걱정하고,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걱정하고, 질병 때문에 걱정합니다. 걱정말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닫힌 현실 때문에 걱정하는 게 아니라, 열린 광야 때문에 두려워해야 합니다. 먼저는 걱정을 멈추고, 걱정을 두려움으로 끌어올리고는, 그 두려움마저 내려놓는 게 믿음입니다.

 

두려움을 갖게 되길, 또 두려움을 내려놓길, 기도합니다.



#민들레교회

#김영준 목사

#걱정 #현실 #광야 #길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