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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좀 달라" _ 요4:6~24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20.07.26|조회수347 목록 댓글 2

예수께서 “길을 가다가 피로”합니다. 길이신 예수께서도 길에선 피곤하십니다. 예수께서 한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십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께서도 목마릅니다. 예수께서도 길을 가다기 피곤하시고, 물마시고 싶어 갈증을 느낍니다.(요4:6)

피곤하지 않기 때문에 길을 가셨던 게 아니라, 피곤해도 길을 가셨습니다. 자신도 목마르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생수가 되셨습니다. 피곤하고 목마른 사람은 예수를 닮았습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자를 만납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다섯 남자에게 버림받았고, 지금 남편에게도 버림받을지 모릅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외롭고 불안합니다. 외롭고 불안한 여자에게 부탁하십니다. “마실 물을 좀 달라”

 

예수께선 여러 남자를 거쳐 온 여자를 외면하지도 않고, 또 남자에게 버려질 성 싶은 여자를 동정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사마리아 여자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도움을 요청한다는 건 상대방을 자신보다 더 낫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기도에는 하나님에게 도와달라고 탄원이 담겨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다른 형식이기도 합니다. 자칫 사람을 우상처럼 여길 수 있지만,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자를 우상 삼으실 린 없습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 좀 달라”고 부탁하시는 건 사마리아 여자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정하는 인사였겠습니다.

 

옛날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8세기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가 앗시리아에 함락되었을 때, 앗시리아 제국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끌고 가기도 했고, 제국의 다른 민족을 사마리아로 이주시켜 혼혈정책을 폈습니다. 기원전 6세기 남유다가 바빌로니아에 함락되면서 예루살렘 성전도 파괴되었다가 다시 페르시아가 패권을 갖게 되었을 때 유다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할 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함께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당시 유다 지도자들은 극단적인 분리정책으로 총화단결을 꾀하고 있을 때라 사마리아 사람들을 예루살렘 재건 사업에서 배제했습니다. 여기서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갈등의 시작됐습니다. 이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성전을 그리심 산에 따로 세웠습니다. 훗날 로마가 유다를 침입했을 때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은 민족적 혈통적으로 유다와 아무 관계가 없고, 사마리아 성전에선 제우스를 위해 제사지낸다고 했답니다. 로마로부터 독립 전쟁을 치를 때 유다 제사장 가문은 사마리아 성전을 무너뜨리기도 했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죽은 사람 뼛가루를 뿌려 모독하기도 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엔 이렇게 묵은 원한이 켜켜이 쌓여있었습니다.

 

유대 남자 예수께서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 좀 달라”고 부탁하십니다. 우리 역사에도 비슷한 얘기가 있습니다. 이성계가 우물터에서 물을 달라 청하고, 우물가 여자가 버드나무 잎을 띄워 주었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이렇게 우물, 버드나무, 잎 등의 상징은 로맨틱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우물가의 여자와 남자가 수작을 주고받는 게 설레는 일이기도 하구요. 우물가에 유대 남자와 사마리아 여자가 말을 섞는 자체가 당시엔 스캔들이었습니다.

 

꼭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절대 말 걸어선 안 될 것 같은 사람입니다. 예수께선 절대 말 걸어선 안 되는 줄 알았던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어쩌면 남자와 여자 사이에 수작 부리듯 말을 걸었습니다. 사람들이 오해하든 제자들이 의아해하든, 개의치 않고 절대 상종치 않았던 사마리아 사람에게 부탁하며 말을 걸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을 만나기 위해 스캔들 따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물 한 바가지를 부탁받은 사마리아 여자가 말이 트입니다. 사마리아 여자도 목이 마르답니다. “선생님, 그 물을 나에게 주셔서, 내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도 않게 해주십시오.”

 

사람들에게 가는 길을 내기 위해 걷는 예수께서도 목마르고,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사람들 눈을 피해 다니는 사마리아 여자도 목마릅니다. 사람에게 가는 자, 사람을 피하는 자 모두 목마릅니다. 우리는 다 목마릅니다. 우리는 다 목마른 사람들입니다.

 

목마른 사람들이 “예배를 드릴 때”가 옵니다. 예배를 어디에서 드려야 정통인지 묻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공간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마리아냐 예루살렘이냐,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도 예루살렘 사람도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옵니다. 사마리아 사람도 예루살렘 사람도 아버지의 자식이니까요. 같은 아버지의 자식들이 우물가에서 상종못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같은 아버지의 자식들이 서로를 못나게 볼 필요도 없고, 자기를 높일 이유도 없습니다. 모두 아버지의 자식으로서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게 당연합니다. 유대 남자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 좀 달라” 부탁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아이 셋을 키우는 이웃 엄마가 있습니다. 국경을 넘어왔고 비자가 없습니다. 이른바 불법체류자입니다. 미등록이주민입니다. 세 아이의 아빠는 세 명입니다. 아빠들은 모두 부양의무를 저버렸지만, 엄마가 일을 하며 아이 셋을 키우고 있습니다. 비자도 없고, 국적도 취득하지 못해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원받지도 못합니다. 어린이집 다니는 아이들도 지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어린이집 원비 요청을 받았습니다. 충분하지 않지만, 7월부터 12월까지 월20만원씩 지원하겠습니다. “물을 좀 달라”는 이웃에게 바가지에 버들잎 띄워 보냅니다. 보육비를 지원할 만큼 우리 예산이 넉넉한 건 아닙니다. 넉넉하지 않아도 국가가 못하는 일, 교회가 합니다. 올해까진 할 수 있겠어서 기꺼이 합니다. 내년 일은 내년에 걱정하겠습니다. 바가지의 물을 아낄 이유가 없습니다물은솟아나는 샘에서 퍼 올리면 됩니다다만체하지 않도록 버들잎 하나 띄워 보내드립니다. 버들잎은 살림살이 어려움을 해결할만큼 나누지 못하는 안타까움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은 다양한 인생이 있습니다. 인생이 다양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다양하고 당연한 인생을 사는 우리는, 모두 목이 마르고, 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식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에게 “물을 좀 달라”고 부탁하신 미등록 이주 여성은 우리 사는 땅에 오신 예수입니다. 여전히, 예수께선 피곤하고 목이 마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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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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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빛나리다 | 작성시간 20.07.26 존경합니다.
    적지만, 결코 적지 않은 결정과 행함이 이 땅에 본이 됩니다.
    그 결정에 박수를 보냅니다..
  • 답댓글 작성자김영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07.28 감사합니다. 소박하나마 믿는대로 걸어가는 교회되길 기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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