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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자기", "불멸의 다이아몬드"로 다시 _ 겔1:1~21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21.01.16|조회수98 목록 댓글 0

"진짜 자기", "불멸의 다이아몬드"로 다시

리처드 로어(김준우 옮김), 『불멸의 다이아몬드』, 한국기독교연구소

 

 

에스겔은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난 서른 살 청년이다. 모세 때 제정된 법에 의하면 삼십 세부터 오십 세까지 회막에서 봉사할 수 있었다. 서른 살 에스겔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제사를 주관해야 했다.

 

그러나 에스겔은 바빌로니아로 끌려왔고, 성전도 무너졌다. 폭망한 거다. 성전은 완파되었고, 바빌로니아로 끌려왔기에 제사장으로서 제사를 집전할 수 없었다.

 

“서러운 서른” 살 청년의 최선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일도 없고, 일할 공간도 없는 에스겔은 스스로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서른 살에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는 누구인가? 제사장 가문의 후예이기 때문에 여전히 제사장인가? 예루살렘을 떠나 바빌로니아에 우뚝한 마르둑 신전 아래 연명하는데도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인가? 보통은 직무와 직위로 자신이 누구인지 판단한다. 직무와 직위로 정체성을 판단한다면, 에스겔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리어드 로어(Richard Rohr,1943~)는 직무나 직위는 정체성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누구인가를 결정”한다. 직무나 직위가 아니라,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내 정체성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성전이 파괴되어 제사를 집전할 수 없지만, 에스겔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집전하는 것처럼 바빌로니아 하늘 아래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한다. 예루살렘도 바빌로니아도 하늘 아래 아닌가. 성전이 파괴 된 세상 하늘 아래 어디로 하나님은 임재하실까.

 

옛날 왕들은 국경에 자기 형상이나 거대한 신의 형상을 세워 영역을 표시했다. 그 형상이 있는 곳이면 그의 땅인 것이다. 에스겔이 끌려온 바빌로니아에도 왕의 형상과 온갖 신의 형상들이 여기저기 세워져 있었다.

 

하나님께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으셨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서 있는 땅이면 거기가 하나님의 땅인 것이다. 바빌로니아에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서 있다면, 거기 바빌로니아는 하나님의 땅인 것이다. 파괴와 유배로 폭망한 현실 속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하려면 에스겔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서 있으려면 “가짜 자기”를 죽여야 했다. 제사장 가문의 엘리트 청년이라는 “가짜 자기”를 죽여야했다. 싸구려 선민의식에 빠진 채 우상과 교합해 아랫도리 비틀거리는 유대인이라는 “가짜 자기”를 죽여야 했다. 온갖 장식으로 치렁치렁한 제사장 옷에 덮인 허울뿐인 “가짜 자기”를 죽여야 했다. 두껍고 무거운 돌벽으로 위장 돼 있던 안보이데올로기라는 “가짜 자기”를 죽여야 했다. “서러운 서른” 살 에스겔이 “가짜 자기”를 죽이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서 있을 때, 비로소 “진짜 자기”로 거듭났다.

 

Engraved illustration of the "chariot vision" of the Biblical book of Ezekiel, chapter 1, after an earlier illustration by Matthaeus (Matthäus) Merian (1593-1650), for his "Icones Biblicae" (a.k.a. "Iconum Biblicarum").,1670

 

“진짜 자기”로 거듭나는 마지막 순간 에스겔은 환상을 본다. “나는 하나님이 하늘을 열어 보여 주신 환상을 보았다.”(겔1:1) 환상은 미래를 여는 문이다. 환상은 현실을 극복하는 시작이다. 바빌로니아로 끌려온 “가짜 자기” 에스겔이 바빌로니아도 하늘 아래인 줄 아는 “진짜 자기”로 거듭나는 마지막 순간 환상을 보았다. 환상 속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 바빌로니아에서도 그는 여전히 제사장인 것이다.

 

제사장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은 ‘생물’과 ‘바퀴’였다. “그 생물들은 어디든지, 영이 가고자 하면, 그 영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갔다. 바퀴들도 그들과 함께 떠올랐는데, 생물들의 영이 바퀴 속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겔1:20) 돌로 지어진 성전 대신 살아 숨쉬는 ‘생물’, 땅에 박혀 움직일 수 없는 성전 대신, 그 영이 가고자 하면 어디든 갈 수 있는 ‘바퀴’를 환상 속에 본다.

 

바빌로니아에 무너지기 전 예루살렘 성전은 절대적 가치였지만, 아니었다. 옛날 예루살렘 성전은 땅에 박혀 움직이지 못하는 죽은 공간일 뿐이었다. 환상을 보며 이전에 절대적 가치였던 “가짜 자기”를 다시 확인하고 “진짜 자기”가 되어, 유배된 이스라엘 공동체를 “진짜 자기”로 다시 세워가는 제사장으로 에스겔은 다시 태어난다. 땅에 박혀 움직이지 못하는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졌지만, 살아 움직이는 바퀴 달린 성전 같은 사람들이 바빌로니아 하늘 아래 건축될 것이다.

 

2020년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지구에 사는 생명체 중 인류를 정밀타격했다. 방역을 위한 보건당국과 의료진의 헌신, 시민들의 자발적 협조로 우리 공동체는 이나마 안녕하다. 그러나 기독교는 원시종교로 내몰리고 있다. 신천지 같은 이단의 밀회장소와 BTJ 같은 열광주의자들이 모이는 센터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크고 작은 예배당들이 집단감염의 진원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옛날 예루살렘 성전이 그랬던 것처럼 어쩌면 우리에게 예배당이 우상이 되어 버린 건 아닐까. 혹은 예배를 빙자한 헌금 수익이 기독교회의 최고신으로 높임 받는 건 아닐까.

 

이전까지 절대시했던 그러나 “가짜 자기”가 있다면 죽어야 한다. “진짜 자기”로 되살아 그 영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생물’과 ‘바퀴’같은 움직이는 성전으로 거듭나는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 다시 태어나는 시간, 아프다.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는 누구일까.

 

글/ 김영준 목사_민들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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