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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너머를 내다본 죄"_막1:40~45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21.09.25|조회수38 목록 댓글 0

접촉이 죄였습니다. 죽어서도 접촉해선 안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병에 걸린 환자와 접촉하는 것도 죄였고, 나병에 걸려 죽으면 외딴곳에 장사지내야 했습니다.(대하26:23)

 

예수께서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접촉하십니다. 실정법을 어기고, 나병환자와 접촉하셨습니다. 접촉하였더니 나병이 나았다고 합니다. 기적이었습니다. 나병 환자 입장에선 누군가 자기 몸에 손을 대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기적이 기적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예수께선 치료된 자에게 치료의 과정을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법을 어긴 게 알려지면 곤란하니까요. 나병환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가 나병 걸린 손을 잡았더니 치료되었다고 소문내버렸습니다. 치료의 기적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예수가 실정법을 어겼다고 언론에 알려버린 셈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선 마을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께서는 드러나게 동네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 곳에 머물러 계셨다.”(막1:45) 외딴 곳에서 스스로를 격리하심으로 자신을 지켜야 했습니다. 나병 환자를 치료해준 예수가 오히려 환자 신세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면 부득이 실정법을 어길 수도 있습니다. 실정법을 어기는 건, 불이익을 감수해야 합니다. 사람들과 관계가 끊어질 수도 있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과 지인들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나병환자와 접촉한 죄는 가볍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기꺼이 죄인이 되셨습니다. 죄인 취급 받았던 나병환자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나병 환자의 자리에서 격리되셨습니다. 당시 죄인이란 나병환자처럼 격리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 너머를 내다보셨습니다. 이 세상에선 나병 환자가 죄인이지만, 이 세상 너머에선 나병에 걸린 게 죄일리 없으니까요. 이 세상에선 나병 환자와 접촉하는 게 죄가 되지만, 이 세상 너머에선 나병 환자와 접촉하는 건 사랑이니까요.

 

그러나 모든 시대에 예외 없이 권력기관들은 이 세상 너머를 내다보는 걸 위험하게 생각합니다. 이 세상을 흔드는 행위니까요. 예수께선 이 세상을 흔들었습니다. 이 세상 너머에서 통용될 법이 무엇인지 전망하시며, 이 세상에서도 실천하셨습니다. “세상 너머를 내다본 죄”로 예수는 십자가에서 처형됐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빛이 죽어 이울지만 다시 꽉 찬 빛으로 채워지는 것처럼, 예수께선 죄 없이 죄를 지어 죽으셨지만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이 예수를 믿어, 따라 살고, 살다가 죽더라도 부활이 있는 줄 아는 게 신앙입니다. 이 신앙을 가진 이들이 교회입니다.

 

2021년에도 달이 꽉 찬 추석이 옵니다. 달이 이울고 차오르며, 다시 이울고 차오르는 것처럼, 사람 사는 모양도 비슷합니다. 꽉찬 추석이길 기도합니다. 누군가 손 잡아주어, 꽉 차게 해주는 추석되면 더 좋겠습니다. 추석에 어린 아이들을 만나지 못하는 엄마가 우리 이웃입니다. 추석에 티브이와 스마트폰으로만 세상과 연결된 청년이 우리 이웃입니다. 추석에 자기 정체성을 감추며 가족을 피해야하는 소수자들이 우리 이웃입니다. 추석에 버스를 타고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없는 장애인들이 우리 이웃입니다.

 

접촉은 죄가 아닙니다. 법을 어기더라도 뜻을 따른 예수가 옳습니다. 이 세상 너머 빛으로 가득한 세상을 여기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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