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2011. 1. 22. 구원받는 사람

작성자hanna|작성시간12.02.08|조회수40 목록 댓글 0

구원받는 사람

                                                                     (사도행전 2:42~47)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9:10)"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일까요. 멋진 역설이지만 어려운 말씀입니다. '보이는' 권력을 두려워하고, '보이는' 자본을 셈할 줄 아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요 명철한 것 아니겠습니까. 지혜자 솔로몬도 보이는 것들을 경외했으니까요.

 

솔로몬은 보이는 애굽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 바로의 사위가 되었습니다(왕상3:1;11:1).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국경을 지켜주시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애굽 바로의 딸이 애굽의 군대를 막아준다고 판단했습니다.

 

솔로몬은 이방 신들보다 이론상으로만 유능한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 보이는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성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성전이 아무리 커도, 성전은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이유는 너무 크시기 때문입니다.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는, 크게 보이는 성전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스데반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행7:48)"

 

그럼에도 보이는 것은 그럴 듯합니다. 보이는 것은 권력도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있어야 먹고 살 것 같습니다. 보이는 것이 가득한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면, 사람은 누구라도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지혜를 받았던 솔로몬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오히려 애굽 바로를 경외하지 않았습니까. 지혜를 소유했던 자라도 하나님을 끝까지 경외할 수 없는데, 애초에 지혜를 지니지 못한 우리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하여 지혜를 취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 있을까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려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또,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야 합니다. 그리고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행2:42~43a)"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려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사도처럼 가르치는 자는 쉼 없이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려면,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야 합니다.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밥을 나누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려면, 기도하며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야 합니다. 사람의 속은 쓰레기통이어서 하나님께 쏟아내지 않으면, 우리의 쓰레기는 다른 사람에게 쏟아집니다. 사도에게 가르침을 받고, 밥 먹으며 교제하고, 기도에 힘쓰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위대한 왕 솔로몬도 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가를 통해 솔로몬이 잃어버렸던 지혜를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며, 기도에 힘쓰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지혜를 취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니, 기사와 표적이 일어납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행2:43)"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니 이사야가 보았던 환상이 현실이 됩니다. 이사야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는 세상을 환상 중에 보았습니다(사11:6~8). 이사야가 보았던 세상은 경계가 허물어진 곳이었습니다. 강한 것과 약한 것 사이에 경계가 사라지고, 먹는 것과 먹히는 것이 더불어 사는 세상이 이사야가 보았던 하나님 나라였는데...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행2:44~45)"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고, 기사와 표적을 경험한 사람들이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이사야의 환상은, 마침내 교회를 통해 땅에서 현실이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까닭에 하나님의 기사와 표적을 경험한 사람들, 그들이 교회를 이루어 하나님 나라를 땅에 현실화시켰습니다. 그들이, '구원 받는 사람(who were being saved)'입니다. 영어번역은 구원 받는 사람의 상태를 '과거완료진행형'으로 표현합니다. 구원받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구원을 받고 있는 사람이 '구원 받는 사람'입니다. 구원은 과거형이면서 또 현재진행형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십니다(행2:47). 구원 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지려면 우리의 구원은 파기될 수 없습니다. 어제 구원받았거든 오늘 구원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제 구원받았거든 오늘 우리는 구원을 누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까닭에 오늘도 '구원 받는 사람'입니다.

 

구원 받는 사람은 날마다 더해갑니다(행2:47). 그러나 폭발적인 양적 증가를 묘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의 설교 직후에 세례를 받은 신도의 수가 삼천 명이었다는 것도 폭잘발적인 수의 성장을 의미하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수의 적음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대 지역의 바리새인의 수는 육천 명이었습니다. 삼천 명은 육천 명의 절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어디에도 수에 관한 극적인 성장에 관해 적혀있지 않습니다. 바리새파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증인으로 활약하는 지를 기록한 책이 사도행전입니다. 바리새파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 사람들이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림인과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구레네, 로마, 그레데, 아바비아로 다시 흩어져 어떻게 제국에 맞서 천국을 세워가는 지에 관한 증언을 기록하는 것이 사도행전의 목적입니다(행2:9~11).

 

민들레교회는 그 수가 적습니다. 그러나 민들레교회는 태국의 소수민족 중학생 2명에게 1년치 생활비와 학비를 지원해서 그들이 '구원 받는 사람'되도옥 도왔습니다. 민들레 교회는 그 수가 적습니다. 그러나 민들레교회는 대한민국에 들어와있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에게 분유 값의 일부를 지원해서 그들이 '구원 받는 사람'되도록 도왔습니다. 민들레 교회는 그 수가 적습니다. 그러나 민들레교회는 난민 구호를 하는 '개척자들'의 불타버린 보금자리를 복구하기 위해 힘을 다해 지원해서 그들이 돕는 난민들이 '구원 받는 사람'되도록 일조했습니다.

 

민들레교회는 바리새인의 절반은커녕 그 비율을 어떻게 계산하지 못할만큼 작지만, 하나님께서는 민들레교회를 통해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실 것입니다(행2:47).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