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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_막2:1~12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21.10.12|조회수69 목록 댓글 0

야구를 좋아합니다. 시간이 없어 야구장에 가지 못하고, 시합 전체를 보기 어렵지만, 하이라이트를 살피고 기사를 읽습니다. 종종 선수들의 부상 소식을 듣습니다. 대단한 부상이 아니라도, 보름씩 시합에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세한 통증만으로도 경기력을 발휘하기 쉽고, 자칫 무리하면 큰 부상을 입을 수 있으니까요. 아프면 경기장에 나오지 않아야 합니다. 시합에 뛰지 않아도 밥 먹을 권리가 있고, 가족을 부양할 의무가 있습니다. 선수를 위해 구단은 치료뿐만 아니라 생활비 지급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건장한 사람도 다치면 일할 수 없습니다. 일하지 않는 동안 잘 쉬고 치료받는 게 중요합니다. 이게 제가 아는 야구의 상식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큰 부상을 당하거나 치료하기 어려운 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몸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다치거나 병에 걸려 생산성이 없는 사람들을, 옛날 유대에선 죄인이라 정죄했습니다. 성전에 들어오지 못했고, 마을에서 격리되어야 했고, 총회 구성원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게 옛날 유대의 법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들르셨던 가버나움 동네에 아픈 사람이 있습니다. 중풍에 걸려 누워 지내는 까닭에 일하기 어려웠겠습니다. 중풍병자에게 친구들이 있어, 그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들것에 실어 예수께로 데려왔습니다.

 

중풍병 환자는 당시 유대의 법에 의하면 성전에 갈 수도 없고, 마을에서 격리되어야 하고 총회 구성원이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병자를 마을 복판으로 데리고 와서, 예수께 보인 것입니다. 당연히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사람들 때문에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자, 지붕을 뜯어내고 예수를 만나게 합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길을 내고, 문을 열어낸 친구들이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하는 중풍병자는 자신의 처지가 괴로웠겠습니다. 또, 도와주는 친구들에게 고마웠겠습니다. 고마우면서도 미안했겠습니다. 괴롭고, 고맙고, 미안한 게 중풍병자의 마음이었겠습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산성이 없는 까닭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해도 돈을 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프면 일하기 어렵습니다. 아프면 사람 노릇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아프면, 괴롭습니다. 가족과 의료인들의 도움을 받는 건 고맙지만, 고마우면서도 미안하고, 미안하면서도 괴로운 게 병자들의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은, 법과 문화 때문입니다. 옛날 유대 사회에 통용되던 법이 병자들을 죄인 취급했고, 그런 문화 속에 살던 사람들은 아프면 복잡한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 사는 세상도 비슷합니다. 옛날 보단 나아져서 법적으로 환자들을 죄인 취급하진 않지만, 경제성을 최고 가치로 쳐주는 분위기에서 환자로 살아가는 건 여전히 괴롭고, 고맙고, 미안한 노릇입니다.

 

이런 세상을 향해 송곳 같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법과 문화의 테두리를 송곳으로 뚫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중풍병 환자를 침상 채 메고 예수께로 데려온 친구들입니다.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중풍병자를, 마을에서 격리되었을 중풍병자를 예수에게 데려온 친구들은 이 세상을 뚫어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송곳 같은 사람들입니다. 중풍병자라 해서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게 진짜 하나님의 뜻인가 날카롭게 질문하는 게 아름답습니다. 높이 쌓인 질서의 꼭대기를 뜯어내서라도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겠다고 모인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하나님의 총회에 총대들입니다.

 

마가복음 2장 5절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대제사장이 선포했던 죄 용서를, 가버나움 동네 지붕 뜯긴 집에서 예수께서 선포하십니다. 성전이 아닌 곳에서,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에게 죄 용서를 선포하신 예수는 과연 큰대제사장입니다.(히4:14)

 

중풍병자에게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신 걸 우리문화에 맞게 번안하면 ‘아파도 미안해하지 말라’는 뜻이겠습니다. 아프기 때문에 겪는 괴로움이야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아프기 때문에 죄 지은 자처럼 주눅들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돕는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이야 가져야겠지만, 누구에게라도 미안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파도 당당하게 밥 먹을 권리가 있고, 아파도 떳떳하게 사람의 의무를 다할 자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송곳 같은 친구들의 믿음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가버나움 초가에 성령이 오십니다. 성령의 바람을 의지해 중풍병 환자가 일어나 걸어서 집으로 갑니다. 마가복음 2장 10절부터 12절입니다. 「예수께서 중풍병 환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집으로 가거라." 그러자 중풍병 환자가 일어나, 곧바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리를 걷어서 나갔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기적은 우리 현실과 다릅니다. 기적을 바라지만 얼른 현실이 되진 않습니다. 기적은 이루어지지 않기도 합니다. 실패, 좌절, 죽음이 훨씬 자주 목격되는 현실입니다. 저에겐 아픈 가족이 많습니다. 아버지가 신장암으로 돌아가셨고, 작은 형이 뇌종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아픈 가족들을 위해, 오래 기도했습니다. 지붕을 뚫을 것 같은 처절한 울음으로 기도했었습니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제게 기적은 낯선 현실입니다.

 

기적은 낯설지만, 낯익은 친구들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동네에 우울증 환자와 더불어 모임을 만들고 함께 운동을 하는 낯익은 친구들이 있습니다. 장애인 자조모임을 위해 조력하고, 난민 청소년들 학습을 지원하고, 이주민 가정의 무너진 마음을 살피는 낯익은 친구들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 낯익은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기적을 베푸실 겁니다. 낯선 기적은 곧 익숙해질 것입니다. 여전히 저는 낯선 기적이 일어날 거라 믿습니다.

 

기적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친구들의 존재는 이미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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