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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_막2:15-17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21.10.24|조회수35 목록 댓글 0

죄를 용서받는 공간이 따로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사람들은 제사를 드리고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사람들의 죄를 하나님이 용서해주신다고 옛날 유대인들은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여염집에서 중풍병에 걸린 사람의 죄를 용서해 줍니다. 중풍병자는 성전에 갈 수 없었을 거에요.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 거란 기대도 하지 않고, 친구들에게 떠메어 가면서 그저 병이 낫기만 바랐을 텐데 느닷없이 죄 용서를 받은 겁니다. 성전이 아닌 여염집에서, 제사도 드리지 않았는데 죄 용서를 받은 겁니다.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해줄 수 있다는 게 옛날 유대인들의 생각이었는데, 인간 예수가 용서를 말합니다. 옛날 유대인들에겐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마가복음 2장 7절입니다. 「이 사람이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한단 말이냐? 하나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나님 한 분 밖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하였다.」 사람이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사람을 용서했다면, 예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어야 했습니다. 「하나님 한 분 밖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는 질문의 속뜻은 예수에게 하나님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 속에서 예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고 선포하는 건, 당시 지도자들이 보기엔 발칙한 행동이었습니다. 여호와 유일신 사상을 믿는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신이라고 선언한 건, 사회를 혁명하겠다는 깃발을 든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신이 되는 건 동시에 죽을 죄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사람이면서 하나님, 하나님이면서 사람입니다. 예수가 사람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이해됩니다. 그러나 예수가 하나님이란 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의 신성이란 무엇일까요? 예수의 신성은 어떻게 증명될까요? 일단 예수께선 스스로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선언합니다. 능력이 아니라 사랑이 신성입니다. 예수의 신성은 병 걸린 사람을 치료해주는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 죄를 용서해 주는 사랑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중풍병 환자에게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걸어가거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말하기가 쉬우냐?」 중풍병자을 일으켜 세워 걷게 하는 것보다 중풍병자를 용서해주는 게 한 차원 높은 신의 역사입니다. 신성은 전능함에 관한 게 아니라 사랑에 관한 성품입니다.

 

그리고, 신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예수는 사람들과 밥을 먹습니다. 마가복음 2장 14절과 15절입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레위는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갔다. 예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들도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한 자리에 있었다.」

 

마태와 마가 누가, 세 복음서 저자는 예수가 신이냐고 묻는 당대 사람들에게,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를 소개합니다. 신성은 죄인들과 함께 밥 먹는 것으로 증명된다고 마가뿐만 아니라, 마태와 누가도 설교합니다.

 

“죄인들”이란 표현을 다른 번역에선 sinners라 적으며 따옴표를 붙입니다. 소위, “죄인들”이란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당시에 죄인들이라 불렀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세리, 창녀, 폭도 같은 이들을 소위 죄인들이라 불었습니다.

 

세리이거나, 창녀거나, 폭도여서 다수 유대인들에게 정죄 받은 게 아니라, 죄인이라 정죄 받았던 까닭에 그들은 세리, 창녀, 폭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유대인 사회에 들지 못했기 때문에 세리가 되어야 돈을 벌 수 있었고, 몸을 팔아야 빵을 먹을 수 있었고, 로마에 유착되었던 지도자들과 달리 폭도가 되어야 로마에 부역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뭔가 사연이 있어 당시 사회통념상 부적절한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소위 죄인들이었습니다.

 

신성은 사회통념상 죄인들이라 불리는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입니다. 기꺼이 시류를 거슬러 주류의 눈 밖에 나는 것을 꺼리지 않는 특성이 신성입니다. 사람이 인성뿐만 아니라 신성을 갖는 건, 그래서 어떤 시대엔 위험합니다. 신약성경이 쓰여지던 당시엔 인간 예수가 신성을 갖는 건 대단히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이렇듯 위험한 신성을 마다하지 않았기에, 예수는 이렇게 하나님이기에 예수께서 들어가신 여염집이 성전이 됩니다. 제물 없이 인애와 자비만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가 됩니다. 큰대제사장이 되어 죄를 용서한다고 선포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함께 밥을 먹는 것이 성찬입니다. 그렇게 밥을 먹는 사람들이 인성과 함께 신성을 갖추어 갑니다. 사람은 흙으로 창조되었고, 생령으로 완성되어 갑니다. 사람에겐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서, 누구에게나 신성의 씨앗이 있습니다. 사람 속에 있는 씨앗이 발아하고 열매가 열리면 신성이 드러납니다. 소위 죄인들과 밥을 먹을 수 있게 됩니다.

 

어느 시대엔 소위 죄인들과 밥만 먹어도 생명을 걸어야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선 밥 먹은 죄로 죽진 않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나누는 성만찬을 두려워할 이유가 우리 시대엔 없습니다. 신성을 드러낼만큼 용감해지기 쉬운 시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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