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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지대_막4:35~41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21.12.26|조회수136 목록 댓글 0

짙은 바다는 무섭습니다. 깊어 짙은 바다에 서 있는 사람은 아무리 수영을 잘해도 위태합니다. 폭풍까지 치면 훨씬 위험합니다. 사람의 키와 수영 실력으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깊음’이 있으니까요. 바다는 그래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높은 밀도로 뭉쳐있는 세상을 상징합니다.(창1:2)

 

예수는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고 제안하십니다.(막4:36,5:1;5:21)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출렁거리는 바다를 건너는 게 가능할까요. 예수께서 폭풍 이는 바다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고요하고 잠잠하라”하고 말씀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고요해졌다.」(막4:39)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막4:41) 하나님의 아들이라야 풍랑 이는 바다를 건널 수 있습니다.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는 제안은 신성을 갖춘 인간이라야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바다 위엔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폭풍 치는 바다에선 하늘마저 가려져 버리기 때문에 방향마저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화가 윌리엄 터너는 폭풍 치는 바다 위에서 돛대에 자기 몸을 묶어 바다를 관찰했다는데, 그가 그린 폭풍 치는 바다엔 어떤 형상도 보이지 않습니다. 꿈틀거리고 휘몰아치는 기운만 확인될 뿐 폭풍 치는 바다엔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습니다. 눈 뜨고 있기에도 버거운 폭풍이라면, 아무것도 보일 리 없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폭풍 치는 바다를 통과해 가며, 바다에도 길이 있다는 걸 증명하신 이가 예수입니다. 보지지 않지만 길이 있습니다.

 

굳이 왜 바다 저쪽으로 가자고 하실까요? 이적을 일으켜 자신의 신성을 증명하기 위해서일까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폭풍을 잠잠케 해 자신의 신성을 증명하는 무대로 바다를 선택하실 리 없습니다.

 

예수께서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고 하시는 건 저쪽에도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군대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막5:1~10) 병에 걸려 죽게 생긴 아이가 있기 때문입니다.(막5:21~24) 12년 동안 피흘리는 여인기 있기 때문입니다.(막5:25~34) 자신의 힘으로 일상을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예수께서 건너가자 하시는 것입니다. 군대에 사로잡혀 무덤 사이에서 쇠고랑에 묶여 쇠사슬에 매여 사는 사람이 있는 ‘바다 저쪽’이 예수께서 가실 길이었습니다. 죽을 거 같은 어린 소녀와 죽어가는 딸을 고치고 싶은 아비가 있는 ‘바다 저쪽’이 예수께서 가실 길이었습니다. 12년 동안 하혈을 하는 까닭에 마을에 들어올 수 없고 사람들을 만날 수 없는 여자가 있는 ‘바다 저쪽’이 예수께서 가실 길이었습니다. 예수께선 오늘도 제안하십니다.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을 때가 있습니다. 코로나 2년이 차갑니다. 민들레교회는 10년을 모이며, 9년째와 10년째 2년을 코로나와 함께 지나왔습니다. 김목사는 길을 잃은 거 같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김목사가 길을 잃었다고 여기는 건 진짜 코로나 때문일까요. 코로나는 낯선 경험이지만 코로나 때문에 길을 잃은 건 아닙니다.

 

바다 저쪽으로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건 길을 잃은 게 아니라 길을 가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군대 귀신에 사로잡혀 쇠사슬에 매여 쇠고랑에 묶여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길을 잃은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죽음에 어찌 할 수 없어 차라리 만나지 않으려다가 길을 잃은 것입니다. 12년 동안 피흘리며 일상을 빼앗인 여인과 접촉하면 사회적으로 지탄받을까 두려워하다가 길을 잃은 것입니다. 길을 잃어버린 게 아닙니다. 길을 가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셨던 길은 우리가 가고 싶은 길이 아니기 때문에 길을 잃어버렸다며 주저앉아 뭉개고 있는 것입니다.

 

바다를 건너가는 건 분명 익숙한 여정은 아닙니다. 바다는 항상 흔들리는 공간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흔들리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바다 위에 길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을 만큼 좁은 길이 있습니다. 예수께선 좁은 길이 생명으로 가는 길이라 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마7:13~14)

 

보이지 않는 바다 저쪽에서 사람들이 부릅니다. 사람들의 고통 소리가 우리 갈 길을 가르쳐 줍니다. 여기에 쉽고 익숙한 길은 사실 길이 아닙니다. 멸망으로 이끄는 포장도로를 길이라 부를 순 없습니다. 여기 익숙한 길들이 막혀 있다면, 길이 보이지 않아 위태하고 위험한 바다로 가야 할 때입니다.

렘브란트, The Storm on the Sea of Galilee, 1633, 160*128cm, 도난당함

 

폭풍이 일면 위태하고 위험할 거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자도 될 만큼 안전한 공간입니다. 바다야말로 길이며, 또 안전한 땅입니다. 옛날 모세는 바다를 마른 땅 같이 안전하게 건넜습니다. 바다를 위험하게 경험하는 건 제국의 군대였지, 광야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겠다는 히브리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이들에게 바다는 안전지대입니다. 익숙하지 않고 보이지 않을 뿐, 바다엔 길이 있습니다.

 

길을 잃은 거 같은 느낌이 있다면, 바다 저쪽으로 갈 때입니다. 바다 저쪽에 사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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