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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_행1:6~9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22.01.16|조회수306 목록 댓글 0

대통령 선거가 열리는 해입니다. 누가, 어떤 세력이 정권을 잡느냐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대선, 총선, 지방선거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습니다. 국가가 관리하는 재정 규모, 국가가 합법적으로 사용하는 위력이 크기 때문입니다. 투표권이 있는 사람은 이번 대선에서 반드시 투표해야겠습니다. 선거를 통한 민의는 하나님의 뜻에 근접합니다.

 

근접하나 완전한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정치는 많은 것을 바꿀 수 있고, 변혁시킬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진 못합니다.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은 선진국이라 분류되지만, 모두가 부유하진 않아, 많은 사람이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곤란을 겪습니다. 밥을 못 먹는 건 아니지만, 여전히 불안합니다.

 

2천 년 전 예수께서 계시던 때에도 정치는 중요했습니다. 예수에게 사도들이 묻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예나 제나 정치는 중요합니다. 정치가 불안정하면, 경제도 어렵습니다. 옛날 로마 제국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절실한 소원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께선 동문서답하십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국권의 회복을 묻는 사도들에게 느닷없이 성령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증인’이 될 것이라 하십니다. 이스라엘뿐 아니라, 땅끝까지 가서 ‘증인’이 될 것이라 하십니다.

 

증인은 순교자(martyr)를 뜻했습니다. 증인은 말하다가 죽는 사람입니다. 회복된 나라에서 살고 싶은 사도들에게 예수께선 말하다가 죽을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말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면, 사도들이 증인으로서 하게 될 말은 당시 체제를 거스르는 위협적인 말이었겠습니다. 로마 제국을 부정하는 말이었겠습니다. 로마의 평화를 무시하는 말이었겠습니다. 말하다가 죽을 수도 있는데도 말하게 될 것이라는 예수의 예언엔 조건이 붙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말을 한다는 건 그저 낱말을 조합할 수 있다는 게 아닙니다. 말을 한다는 건 자기 스스로 생각할 줄 알고, 생각한 것을 정밀한 언어로 표현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제도와 관습과 유행을 따라 낱말을 조합하던 사람들을 자기만의 고유한 생각으로 말하게 합니다. 성령이 내리면 생각의 자유를 얻게 됩니다.

 

내가 뽑은 대통령이 당선된다해도 우리는 대한민국을 완전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발전한 선진국이 된다해도 우리는 그 이상을 상상할 것입니다. 이렇게 고유한 생각으로 말하는 사람은 더 좋은 나라를 증언할 것입니다. 이미 존재하는 나라를 순간순간 전복시키며 새로운 나라를 제안하는 증인이 되라는 게 예수의 부탁입니다.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이육사(1904-1944) 선생이 소천하셨습니다. 이육사는 일제 강점기 의열단에 가입해 군사 훈련을 받고 총을 다루던 독립운동가였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육사의 총이 아니라, 시를 기억합니다. 일본제국은 이육사를 화약 때문에 죽였겠지만, 이육사가 일본제국 너머에 있을 세상에 관해 남긴 시는 남아있습니다. 성령은 체포되지 않습니다. 성령을 따라 증언된 말은 시대를 넘나들며 활동합니다. 증인은 죽지만 증언은 쉼 없이 부활합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말을 하다가 죽을 수도 있는 증인을 찾으십니다. 대한민국 너머에 있을 더 좋은 나라를 말하는 증인들이 교회입니다. 서울과 평양과 한반도 전체와 지구 세상 끝까지, 하루하루 더 좋은 나라가 어떻게 변혁되어야 하는지 정밀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증인입니다. 변혁된 세상을 말하다가 혹 죽는다 해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말하다가 죽을 수도 있는데도 말하는 사람들이 교회라는 데엔 조건이 붙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성령은 성전이라는 건물과 제도와 격식 따위에 갇히지 않습니다. 성령은 심지어 성경이라는 문자와 전통과 권위에도 갇히지 않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인용하는 말이라 해도, 문자주의에 머무르거나 ‘종이 교황’ 노릇하며 누군가를 혐오하고 배제하는 폭력의 도구가 된다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성령은 하늘까지 높은 성전과 무관하며, 성령은 문자주의에 갇힌 성경에 매이지 않습니다.

 

성령은 바람이어서 어떤 그물에도 걸리지 않습니다. 자유로운 성령은 성전의 격식과 성경의 권위를 초월합니다. 성전과 성경을 초월하기 때문에 성령은 옛날에도 유대교를 초월해 유대땅 바깥 땅끝까지 활보했습니다. 성령은 옛날 유대교를 초월했듯이 지금은 기독교를 초월합니다. 성령과 함께 기독교의 교리와 전통을 초월한 교회가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닐 때에만 기독교입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는 기독교여야 기독교입니다.(막8:34)

 

정치는 말과 말의 전쟁터입니다. 말과 말이 충돌하는 토론이 있어, 권력을 다투는 이들이 피를 흘리지 않습니다. 싸움밖에 되지 않는 토론이라 해도, 상대방을 죽이지 않아도 되는 앞으로 세상에 대한 정치 토론은 유익하고 안전합니다.

 

한편 우리는 각자 자신의 고유한 말로 세상과 맞서야 합니다. 말로 생각하고, 생각을 말로 표현할 수 있도록 평생 공부합니다. 듣고 읽고 쓰고 대화하며, 각자의 말을 다듬어가며 증인으로서 스스로를 훈련시킵니다.

 

증인은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말 때문에 순교자가 될 수도 있는 말, 진짜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는 말이 우리의 혀 위를 구를 때, 구원이 시작됩니다. 말을 듣고, 말을 읽고, 말을 쓰고, 말을 전하며, 증인이 되어갑니다. 성서를 듣고 읽고 쓰며, 함께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내리시면 기독교가 아닌 기독교를 말하게 됩니다. 구축된 기독교 세계에서 기독교를 말하는 건 자칫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살던 당시뿐만 아니라 불관 몇 백년 전만 해도, 많은 사람이 말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지금은 말 때문에 죽진 않습니다. 이렇게 안전한 세상에서 증언과 토론을 피할 명분이 없습니다. 또렷이 말할 수 있습니다.

 

세습하고 횡령하고 혐오하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성령과 함께 기독교를 떠나 땅끝에 서는 증인들이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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