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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_행4장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22.02.05|조회수27 목록 댓글 0

0.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 당한 옛날 예루살렘은 교회로 모이기에 안전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처형당했다면,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이들도 처형당할 위험이 높으니까요. 그럼에도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신 첫번 째 명령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1.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은 위험을 감수할 수 있었던 건, 죽으신 예수가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죽음보다 위험한 게 없겠지만, 그 죽음마저 부활로 극복한 예수를 경험한 까닭에 사도가 된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남아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기도하다가 성령을 경험하고, 이전과 달리 또렷하고 담대하게 말도 합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을 일으켜 걷게도 합니다.

 

2.

갑자기 용감해지고 똑똑해진 사도가 된 제자들을 보러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사도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믿는 사람이 많으니, 남자 어른의 수가 약 오천 명이나 되었다.」(행4:4) 예루살렘에서 남자 어른 오천 명을 모으는 것 자체가 위험한 행동입니다. 예수께서 잡혀가실 때 배반하고 부인하며 흩어졌던 제자들은 지금, 그 때와 분명 다른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부재하는 지금, 제자들은 스스로 예수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3.

예수께서 계실 때도 남자 어른 오천 명이 모였습니다. 그 땐, 마을에서 떨어진 광야였습니다. 그나마 눈에 덜 띄는 장소였는데, 지금은 예루살렘입니다. 광야에서 오천 명을 모았던 예수보다, 예루살렘에서 오천 명을 모은 제자들이 훨씬 위협적이고, 그래서 많이 위험합니다. 예수는 죽었지만, 예수보다 더 예수를 닮은 제자들의 면면을 통해 예수께선 부활하십니다.

 

4.

예수께서 광야에서 이야기하실 때도 모인 사람들이 광야에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고 배불렀습니다. 끼니를 챙겨오지 못할만큼 가난한 사람들이 모였지만 배고프지 않았던 그 때 처럼,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도 가난하나 가난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키프로스 태생으로, 레위 사람이요, 사도들에게서 바나바 곧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별명을 받은 요셉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밭을 팔아서,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행4:34~37)

 

예수께서 광야에서 오천 명에게 이야기하실 때,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았던 것처럼,(요6:9)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 오천 명이 베드로의 설교를 들을 때, 바나바가 밭을 팔아 사람들의 필요를 채웁니다. 바나바 혼자 사람들의 필요를 채운 건 아닙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협력했는데, 아마 "바나바"가 분위기를 만들었지 싶습니다. 

 

바나바(Βαρνάβας)라는 이름을 그리스어로 풀면 '위로의 아들'이란 뜻에 가깝다고 합니다. 또 아람어 발음을 따라 쓰면, 바나바(בר נחמה)라 쓰는데, 히브리어로 예언자(נביא)와 발음이 비슷합니다. 바나바라는 이름은 그래서 '예언자의 아들'이란 뜻도 담고 있습니다. 예언자의 아들이란 이름에 걸맞게 바나바는 교회에서 이야기를 주도하는 사람이었고, 이야기만 주도한 게 아니라 재산을 나누어 가난한 사람을 살피는 일도 솔선합니다. 바나바는 교회에서 예언하고, 교회를 위로합니다. 

 

5.

예수가 처형됐는데, 예수보다 더한 사람들 때문에 예루살렘이 들썩거립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을 치료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건 민간에서 할 일이 아니라는 게, 권력자들의 생각입니다. 관련 당국이 마땅히 해야할 일이며, 당국이 아니면 해선 안된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당시 종교자들이 청문회를 열어, 교회 지도자들을 신문합니다. 

 

대제사장 안나스를 비롯해서,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그 밖에 대제사장의 가문에 속한 사람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그들은 사도들을 가운데에 세워 놓고서 물었다. "그대들은 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행4:6~7)

 

걷지 못하는 사람을 고칠 때 제사장의 결재를 받았느냐, 사람들 오천 명을 모을 때 로마 당국에게 집회 허가를 받았느냐, 집과 밭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시장이 혼란스럽지 않겠느냐, 뭐 이런 질문들을 하나로 묶어 물었습니다. "그대들은 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

 

김포시 공무원은 김포시장의 권위와 이름으로 일합니다. 경기도 공무원은 경기도지사의 권위와 이름으로 일합니다. 중앙 정부 부처의 공무원들은 장관의 이름으로 일합니다.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일하냐는 질문은 어느 기관에 속해있냐는 질문입니다. 기관장은 반드시 살아있는 사람일 거구요.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한다구요.(행4:10)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서 처형된 나사렛 사람 예수의 이름으로, 베드로는 일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일하는 건 예수가 살아있다는 고백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일하는 건 로마 당국과 성전주의자들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일하는 건 예수처럼 죽을 수 있다는 걸 감수하는 것입니다. 

 

6.

예수의 이름으로 일하는 건, 예수에게 품의서와 기획안을 올렸을 때 예수께서 결재했음직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결재하신 지출결의서엔 액수가 적혀있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걷지 못하는 사람을 일으켜 세울 때, "은과 금"이 필요없었습니다. 어떤 지출결의서엔 부동산을 매매할 수 있을만큼 큰 액수가 적혀있기도 합니다. 바나바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땅을 내놓기도 했으니까요. 

 

돈이 들지 않든, 큰 돈을 들이든, 교회는 예수의 이름으로 일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 예수의 이름으로 하겠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예수인입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을 일으켜 세워주는 일, 가난한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7.

다행히 우리 사는 세상은 옛날 예루살렘처럼 위험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오신 후 2천년 동안 인류는 조금씩 진보했지 싶습니다. 그러나 진보한 인류에 의해 지구가 상하고 문명 밖 자연이 위험해졌습니다. 이제 예수의 이름으로 일하는 건,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서 걷지 못하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일과 아울러, 2천년 동안 성취한 진보를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돈 없이, 혹은 큰 돈을 들여,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돌보는 일을 기획하고 품의를 올려, 예수께서 결재하실 일을 합니다. 

 

8. 

2022년 3월에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대통령은 힘이 셉니다. 대통령의 힘은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고,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도록 하는 일에 소진되어야 합니다. 날까로운 이빨로 사람을 해치는 세력은 무너지고, 직무의 스트레스로 생니가 빠지도록 일하는 이들이 세워지길 기도합니다. 선거 결과에 따라 아픈 사람들의 진료비와 가난한 사람들의 일상이 달라집니다. 국정 최종 결재권자인 대통령으로서 마지막 서명을 할 때, 예수에게 그 손목을 맡기는 자가 참 대통령입니다. 

 

9.

교회는 모여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더 좋은 하나님나라를 상상하며, 그 하나님 나라를 맞이하고자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월요일엔 창세기를 읽으며, 수요일엔 인문학 책을 나누며, 금요일엔 성경을 필사하며 기도합니다. 모여 기도하는 교회를 통해 걷지 못하는 이가 걷고,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을 느끼지 못합니다. 교회도 힘이 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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