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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다스도 안다_마6:19~34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22.07.03|조회수180 목록 댓글 0

내 발에 맞는 신, 상황에 최적화된 신이 있다. 테니스화는 옆으로 미끄러지지 않게 단면이 넓다. 복싱화는 키를 낮추기 위해 굽이 낮다. 농구화는 착지 시 충격을 줄이기 위해 발목이 높다. 1954년 스위스 베른 월드컵 결승전은 수중전이었다. 독일이 헝가리를 3대2로 이기고 우승할 때, 아디다스 축구화를 신었다. 당시 아디다스 축구화는 스파이크를 운동장 상황에 따라 교체할 수 있는 것이었다. 비가 심하게 내리는 운동장에서 독일 선수들은 미끄러지지 않도록 스파이크 길이를 긴 것으로 바꿔 뛰었다고 한다. 아돌프 다슬러는 축구화에 스파이크를 처음 적용했다. 아돌프 다슬러의 애칭이 아디였고, 그가 만든 브랜드가 아디다스.

 

무엇을 하느냐,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신발의 종류가 달라진다. 내 몸에 맞지 않을 때, 내 가는 길과 맞지 않을 때, 이전의 신발은 벗어야 한다. 옛날 모세는 이집트 왕자였다. 미디안 제사장의 사위였다. 모세는 그러나, 이집트 왕자로 살 수 없었고, 미디안의 제사장이 될 수 없었다. 모세에겐 모세가 가야할 길이 있었다. 모세의 발에 맞는 신발을 찾아야 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먼저 ‘신을 벗으라’ 하신다.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너는 신을 벗어라(출3:5).」 내가 신고 있는 게, 신겨진 것은 아닌가. 나는 내 발에 맞는 신발을 신고 있는가. 또, 현재 상황에 최적화된 신발인가. 익숙한 방식대로, 강요된 관습대로, 개선의 의지 없이 그저 가던 길을 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실 때, 먼저 ‘신을 벗으라’ 하신 건, 이집트 왕자였던 모세가 아니라, 미디안 제사장의 사위 모세가 아니라, 히브리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기 위해 이전에 강요되고, 익숙한 모든 걸음걸이를 교정하기 위한 첫 조치다.

 

‘나는 나’라고 스스로를 소개하신 하나님께선, 모든 사람이 ‘나는 나’로 살길 바라신다. 내 발에 맞는 신을 신고 내 길을 가는 게, 인간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다는 건, 인간에게 신성이 있다는 뜻이다. 신성을 가진 인간으로, ‘나는 나’이신 하나님처럼, ‘나는 나’로 사는 게 참 인간이다. 누구의 지배를 받지 않는 인간으로서, 주권을 행사하는 인간으로서, ‘나는 나’로 사는 게 구원이요, 해방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독존하지 않는다. 나는 관계 속에 정의된다. 가정과 동네와 직장 등 모임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기대를 받으며 관계를 맺는다. 나는 관계 속에 있다. 관계 속에 있는 다양한 나는 하나도 버릴 게 없다. 다 나다. 다만 혈족과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 모세가 모세의 길을 가려면, 이집트 왕자였던 때를 잊어야 한다. 모세가 모세의 길을 가려면, 미디안의 사위라는 걸 포기해야 한다. 혈족의 기대를 무시해야 한다. 혈족에 의존하는 걸 멈춰야 한다. 모세는 히브리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모세의 길을 간다. 혈족 아닌 사람들과의 관계, 그 다양한 관계 속에서 불리는 이름들이 모두 나다. 나는 여럿이다. 수많은 여럿의 내가 모여 참 인간으로 완성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다.

 

다양하게 관계를 맺는 사람 중엔,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말하지만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참 인간으로서 나는 특히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람들의 작은 소리를 듣고, 말할 수 없는 사람들로 말하게 하며,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참 인간으로 완성된다.

 

바다에 버려진 폐그물을 수거해, 폐그물에서 나일론을 뽑는 사람들이 있다. 넷스파라는 기업이다. “어민들이 쓰는 어망과 어구가 바다 오염을 일으킨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폐그물을 재생해서 나일론을 뽑아내는 사업”을 한다. 나일론 뽑기는 쉬운 공정이라, 폐그물을 재생해서 나일론을 뽑는 게 타산에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굳이 폐그물을 재생하겠다는 건 폐그물에 죽어가고 파괴되는 말할 수 없는 바다 생물의 목소리 때문이다(롬8:19). 스스로 세상에 그 목소리를 들리게 말하지 못하는 바다 생물과 관계를 맺은 참 인간이기 때문에 해야하는 일, 가야할 길이 있다.

 

 

그러나, 폐그물을 재생해 나일론을 뽑아내는 게 이익이 될까. “어민들이 쓰는 어망과 어구가 바다 오염을 일으킨다는 걸 다룬” 다큐멘터리 <씨스퍼러시>가 넷플릭스에서 대박을 터뜨린 후, “환경부가 움직이면서” 이익도 내는 회사가 되었다. “경남 하동에 설비 공장이 있는데 아디다스 부사장이 재생 나일론을 사기 위해 찾아올 정도”라고 한다.

 

돈만 생각한다면 하지 않을 일이었다. 수익률만 계산한다면 굳이 하지 않을 일, 그러나 관계를 생각하면 돈이나 수익률 따지지 않고 하게 되는 일이 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다.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 않는 생명들과 관계를 맺고, 내 몸에 그 목소리를 싣고, 내 발로 그 목소리를 세상에 전하는 게 전도다. 전도는 도를 전하는 거 아닌가.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마6:33).」

 

폐그물에서 뽑아낸 나일론으로 신발을 만드는 게 이익이라고 아디다스는 판단해, 부사장이 안성까지 찾아왔겠다. 의로움이 이로운 것이라고 아디다스도 안다. 말하려 해도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를 따르는 게 인간이 가야 할 길이다. 그 길을 가야만, 그 도를 담아야 신발을 팔 수 있다는 게, 현재 아디다스의 계산일 것이다. 어떻게 해야 돈을 벌 수 있는지 가장 명민한 기업이. 의로움이 이롭다는 걸 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아디다스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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