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불안합니다
불안하다고 말하거나 쓸 때, 목적어가 없습니다
두려워하다고 말하거다 쓸 땐, 목적어가 있지만
불안한 건 그냥 불안한 겁니다
1.
그래도 불안한 데엔 이유가 있습니다
아무 일 닥치지 않아도, 상황이 딱히 나쁘지 않아도
시간은 흘러갑니다. 가만있어도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흐름 따라 떠내려 가는성싶어 불안합니다
2.
가만있지 않고 무언가를 하며, 뛰거나 걸을 때도 불안합니다
인생은 곧은자를 따라 그어진 직선이 아니니까요
직선으로만 뻗은 인생이란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어디까지 가야할지, 끝까지 갈 수 있을지
인생 앞에 난 길은 직선이 아니라서 그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끝을 알 수 없어, 열심히 뛰고 걸을 때도 불안합니다
굽이치고 꺾이며, 흐르거나 걷습니다
오른쪽으로 굽이치면 과연 큰 강이 나올지
왼쪽으로 꺾으면 과연 초록 숲이 있을지
모릅니다, 사는 내내 불안합니다
자연으로 난 길은 언제나 곡선이라
자연과 투쟁에 익숙한 인생에겐 늘 불안가득입니다
3.
사람이 만들어 효율을 높인 직선 길이 있습니다만
직선으로 난 길은 위험하기 십상입니다, 길이 생명을 죽입니다
사람이 만들었어도 곡선 길에선 로드킬이 없어요
꺾어야 할 때, 굽이를 돌 때, 천천히 가야 하니까요
빨리 가겠다는 일념으로 급히 꺾고 빨리 돌면 길이 생명을 죽입니다
물길도 그래요, 자연으로 난 물길은 굽어 흐르거나 둘러 흐릅니다
청계천은 곧은 물길이라 스스로 살 수 없습니다
전기로 한강 물을 억지로 끌어 흐르게 하는
직선 청계천에선 물고기도 물의 속도를 감당 못해 살기 힙듭니다
꺾인 길 굽어진 길이 살 길입니다
꺾인 인생, 굽어진 인생이라야 진실로 살아있는 겁니다
4.
꺾이고 굽어진 길을 보며 처음부터 불안했던 건 아닙니다
처음 세상을 만났던 우리네 눈빛엔
불안이 서리지 않고, 놀람과 호기심만 가득했답니다
놀람과 호기심 가득한 눈이, 본래 우리의 눈이었습니다
모퉁이를 돌아가면 뭐가 있을까
굽이굽이 흘러가면 어디에 닿을까
호기심 어린 아이의 눈빛이 우리에게도 있었습니다
5.
호기심이 사라진 건 믿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선악을 가르고, 호오를 고르며
삶이 아니라 살아남기에 집착합니다
호기심 따라 길 걷는 게 아니라, 아스팔트 깔린 길에 실려가다보니
닦아진 길이 아니면,
지평선 끝자락이 낭떠러지가 아닐까
수평선 마지막엔 폭포가 있진 않을까
불안해하다가 믿음도 잃고 호기심도 사라졌습니다
6.
꺾어지고 굽어진 길
몸도 꺾이고 굽어진 노예 같은 일상, 그래도
아직 살아있거든, 여태 온 길이 살 길이었습니다
다시 오른쪽으로 꺾어지거든
혹은 왼쪽으로 굽어지거든
또, 모르는 인생이 시작됩니다
몰라서 지레 불안하지요만, 모르니 미리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걱정합니다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생길까요,
호기심 가득한 믿음으로만, 첫날입니다
빛이 있으라,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