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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_마16:24~17:5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23.02.19|조회수55 목록 댓글 0

목사님,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소원을 들어주시나요...?”

 

짧은 질문이지만, 긴 이야기가 있을 질문을 받았습니다. 특수한 상황에서 길어 올린 질문일 수 있지만, 모두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기도, 소원. 찬찬히 생각해보면, 단어 하나하나가 어려운 말입니다. 이런 어려운 것을, 목사에게 묻습니다. 목사가 답하기 버거운 질문이지만, 고마운 일이기도 합니다.

 

제법 나이가 들었는데 돌아보면 뭘 했나 싶을 때, 있습니다. 일자리는 불안정해서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싶을 때, 있습니다. 관계는 흔들리고 터놓고 말할 사람이 없을 때, 있습니다. 과정마다 닿아야 할 목표에 미치지 못해 저평가를 받을 때, 있습니다. 이런 순간순간이 쌓이면, 헤어나오지 못할 늪에 빠져드는양 공포가 덮칩니다. 헤어나올 수 없는 깊은 우울에 빠집니다.

 

한숨을 쉽니다. 신음을 냅니다. 하나님을 부릅니다. 어떻게 해야 한숨과 신음이 하나님에게 닿을지, 목사에게 묻습니다. 목사에겐 답이 없지만 고마운 일입니다. 미안한 일이기도 합니다. 목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기도의 방법이 따로 있을 리 없으니까요.

 

전설을 소개합니다. 책에서 읽었는데, 내용 전체가 정확히 기억나진 않습니다. 조금 각색해서 소개합니다. 어느 섬으로 수도사가 건너가 평생동안 한 번도 기도해보지 않은 노인에게 기도를 가르쳐주고 왔답니다. 이런저런 예식서도 쥐어주고, 연중 어느 절기에 하루 중 어느 시에 기도하라고 자세하게 일러주었습니다. 다시 육지로 배를 타고 돌아오는데, 섬에서 만난 노인이 바다 위를 걸어 배 위에 있는 수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곤, 수도사님께 번거롭게 해 죄송하다면서, 고기잡이 하는 어부들의 안전을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느냐고 질문했답니다.

 

어부들의 안전을 위해 어떻게 기도할 줄 모르지만, 예수처럼 바다 위를 걸을 줄 아는 노인에게 수도사가 뭘 가르치겠습니까. 세상에서 일상을 살아내는 이에게 목사가 뭘 가르치겠습니까. 이런 목사에게 어떻게 기도할지를 물어봐 주는 건 고마운 일입니다. 미안한 노릇입니다.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는 뜻은 평화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2:14) 전쟁 없는 평화, 갈등 중에도 서로 해치지 않는 평화, 산이 깎이고 골짜기가 메워져 위 아래 없는 평화가 땅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런 예수의 뜻을 아는 것에서 기도가 시작됩니다. 기도하는 방식이 따로 있진 않습니다. 예수의 생각을 공유하고, 예수의 걸음에 동행하는 게 기도입니다.

 

 

포사이드 선교사가 목포에서 광주로 오는 길이었습니다. 청년 최흥종이 마중 나갔습니다. 포사이드와 최흥종이 만나 광주로 오는 길에 길에 쓰러져 있는 한센병 여인을 만납니다. 한센병 앓는 여인은 지팡이를 쥐고 있지만 걷지는 못합니다. 포사이드가 자신이 타던 말에 여인을 태우다가 지팡이가 떨어져 최흥종에게 지팡이를 집어 달라고 했는데, 최흥종은 지팡이를 집지 못합니다. 포사이드는 여인을 안아 말에 태웠지만, 최흥종은 지팡이를 집어주지 못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예수께서 기도를 가르쳐주신 건, 기도의 방법에 관한 게 아니라 기도의 내용이었습니다. 예수께선 어떻게 소원을 빌어야 할지가 아니라, 무엇을 소원해야 하는지 가르치셨습니다. 소원이 틀리면 불행합니다. 소원이 맞다면 무엇을 하든 괜찮습니다. 성공과 성과를 소원 삼는 건, 예수께서 가르치진 기도에 대한 틀린 답입니다. 성공과 성과를 소원 삼는다면, 그 소원을 이룬다해도 다른 이의 소원을 좌절시킨 대가입니다. 성공과 성과를 소원 삼을 땐 누군가 좌절하길 바라는 것입니다.

 

소원이 틀리면 수치에 집착하고, 소원이 맞으면 가치에 집중합니다. 소원이 틀리면 의사가 되어 큰돈을 벌고 싶고, 소원이 맞으면 의사가 되어 환자에게 말을 내줍니다. 소원은 의사가 되는 게 아니라, 내 것을 가난한 이를 위해 쓰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가 무엇이 되는 게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사느냐 묻는 것입니다. 수치가 아니라 가치를 생각하라는 게,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입니다.

 

제도 종교 기관에 종사하는 목사가 하기에 민망한 말이지만, 예수께서 가신 길을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라 하십니다. 이런 예수의 말을 들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를 위해 무언가를 하려는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선 그 말을 들으라 하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라 하십니다. 한센병 환자를 말에 태워 의사 포사이드가 목포에서 광주로 걸었던 길을 생각합니다. 한센병 환자가 떨어뜨렸던 지팡이를 들지 못한 채, 포사이드를 따라갔던 최흥종의 부끄러움을 생각합니다. 부끄러운 채, 예수의 길을 멀찍이 따라 걷습니다. 너무 멀어 보이지 않을 만큼 뒤쳐져 걷습니다. 부끄러움을 감추려 왜 하나님은 나와 동행하지 않느냐 불평도 합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부끄러움, 불평 없이 하나님의 소원을 땅에서 이룰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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