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꼿꼿당당 _ 창20:1~16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13.01.27|조회수70 목록 댓글 0

아브라함은 권력 앞에 무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리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라함이라는 큰 이름을 주셨는데, 이름값을 하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은 무리의 아버지가 아니라 무력한 아버지 같습니다. 블레셋 그랄 땅의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속절없이 빼앗깁니다(창20:2). 노아 시절 홍수로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 있었던 남의 아내를 빼앗는 왕들의 횡포가 재현되고 있습니다(창6:2). 권력을 지닌 왕들의 횡포에 아브라함은 반복적으로 굴복합니다(창12:9).

 

사람은 누구나 권력을 두려워합니다. 권력은 뭇사람들의 생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기도 하니까요.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창20:11)”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알렉산더도 죽었고, 카이사르도 죽었습니다. 전쟁의 영웅들도 죽는 마당에 평범한 소시민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요. 전쟁의 영웅들도 어찌할 수 없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누구나 죽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알고, 그래서 언젠가 닥치게 되는 죽음의 그림자를 피할 수 없어서, 사람은 항상 두려움을 품고 살아갑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두렵거든, 사람입니다. 아브라함도 사람이라, 죽음이 두렵습니다.

 

생명(生命)을 한 자 한 자 짚어봅니다. 생명(生命)은 살아있으라(生)는 하나님의 명령(命)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폐기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이 있다면, 살아 있으라는 하나님의 명령, 즉 생명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지만,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죽어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永生)’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40)”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저 생명 연장이 아니라, ‘다시 살리리라’하신 말씀대로 죽어도 죽지 않는 영생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연장된 생명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즉 영생을 사는 것입니다. 영생은 진시황제가 꿈꾸었던 불로장생(不老長生)이 아닙니다. 영생은 진시황제에게 생매장당한 학자들에게 제시될만한 ‘다시 살리리라’하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영생은 세상의 흐름을 따라 적당히 타협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권력이 안겨주는 두려움을 망각케 하는 종교적 아편이 아닙니다. 영생은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오르다가 마지막 생명의 진액을 짜내고 죽는 연어같은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노아 시대 멸종되었으나 불로장생하듯 되살아난 악한 왕에게 아내를 바침으로 보장받은 ‘생명 연장’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둘째 사망’을 경험하지 않는 것, 죽어도 죽지 않는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계2:11)”

 

‘야누슈 코르착’은 사회사업가이며, 의사였고, 폴란드 최고 문학상을 수상한 문학가였습니다. ‘야누슈 코르착’은 유대인입니다. 코르착은 바르샤바에서 200여명의 유대인 고아들을 돌보다가 공부를 하기위해 이스라엘 키부츠로 떠났습니다. 1939년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유대인 코르착은 고아들을 돌보려고 독일군이 점령한 바르샤바로 되돌아갑니다. 코르착을 아는 유력인사들이 그를 구출하고자 하지만,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그는 구출 받지 않습니다. 1942년 8월 6일, 코르착은 깃발을 들고, 넷씩 짝지은 200명 고아들의 맨 앞줄에 서서 행진을 합니다. 행진의 목적지는 가스실입니다. 아이들은 단정한 옷을 입고 좋아하는 장난감이나 책을 손에 들고 당당하게 가스실로 들어갑니다. 지켜보던 독일군 병사가 자기도 모르게 코르착과 아이들을 향하여 거수경례를 합니다. 코르착은 고아 200명과 함께 가스실에서 불에 타 죽습니다.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12:4~5)”

 

영생, 영원한 생명은 악한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코르착과 아이들은 구출되지 못했지만, 구원받았다고 저는 믿습니다. 영생은, 몸을 죽일 수 있는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의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연장된 생명을 얻지만,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잠9:10).

 

하나님만 두려워하겠습니다. 하여, 세상의 어떤 권력 앞에서도 강력하소서. 꼿꼿당당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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