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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도 우물이 있습니다 _ 창21:8~34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13.02.24|조회수172 목록 댓글 9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니,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눅18:1). 그러나 우리는 항상 기도하지 않습니다. 자주 낙심합니다. 기도해야할 만큼 힘들면, 기도 잘되지 않습니다.

 

여자 하갈의 어깨에 떡과 물 한 가죽부대가 있습니다(창21:14).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지기까지 며칠이 걸렸을까요(창21:15). 광야에서 물이 떨어졌습니다. 죽을 것 같은 자리에서 하갈과 아들 이스마엘이 화살 한 바탕만큼 떨어져서 마주보며 울고 있습니다(창21:16). 기도 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하갈과 이스마엘은 기도마저 할 수 없습니다. 기도할 수 있다면, 그래도 견딜만한 것입니다. 기도마저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기도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을 땐, 기도마저 잘되지 않습니다. 우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한숨 쉬며 신음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울음소리를 들으십니다(창12:17). 기도마저 하지 못하는 자의 울음소리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이 아니라, 울음소리에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의 울음소리를 들으셨다면, 한숨 또한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신음 소리 또한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우리가 자세를 잡아 무릎 꿇고 기도를 바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한숨과 신음 소리를 기도로 받으십니다.

 

울음소리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하갈의 눈을 밝혀주십니다. 하갈이 우물을 발견합니다(창21:19).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위해 이미 광야에 ‘브엘세바’라는 우물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브엘세바는 아브라함이 블레셋 아비멜렉에게 양도받은 우물입니다(창21:25~27).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지내던 중에 여호와 이레, 즉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창22:14,19). 아브라함은 ‘준비해주시는 하나님 여호와 이레’를 만나며, 브엘세바에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광야로 내쫓은 것은 내쫓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물 한 가죽부대만 준 것이 아니라, 사실상 우물이 있는 곳으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물 옆에 나무를 심어 그 위치를 정확하게 피악하고 있었으니까요(창21:33).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광야로 내치십니다. 죽을 것 같은 광야로 내모시고는 기도마저 할 수 없을 만큼 힘들게 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로 내치실까요.

 

5세기 로마제국이 기울어가던 시대 훈족과 반달족의 침입을 받아 피난 가던 사람들이 갈대외엔 아무 것도 자라지 않는 바닷가 ‘베네치아’에 정착합니다. 베네치아는 갈대 외엔 자라는 것이 없어 약탈자들의 표적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적들이 탐내지 않는 척박한 곳이 오히려 생명을 보존하고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사람이 살 수 없던 베네치아가, 유일한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모이고, 세력이 점점 커지면서, 훗날 베네치아는 물자가 풍부한 항구도시가 됩니다.

 

사람들이 살지 않고, 꺼리는 광야는 오히려 사람의 위협을 받지 않는 안전한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베네치아같은 극한의 장소 광야로 우리를 내치시는 것은 약한 우리를 악한 자들로부터 보호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광야로 내치실 때에는 ‘물 한 가죽부대’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물’을 준비해 두십니다. 어깨에 짊어지지 않아도 되고, 마르지도 않는 ‘우물’이 있어 광야를 이기게 하십니다.

 

광야에 서 있어도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마엘에게 ‘원한’이 있었을 것입니다(눅18:3,5,7,8). 아버지가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왜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아버지가 믿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왜 원한이 되지 않겠습니까. 원한이 풀리지 않으면 낙심하게 되는 것이지요. 원한이라 할 만큼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있을지라도,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비록 ‘광야’를 살지만, 하나님께서 준비해주신 ‘우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에 있어 우리는 베네치아 사람처럼 안전할 것이요, 우물이 있어 우리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창창할 것입니다.

 

풀리지 않는 원한이 있어도 낙심하지 않겠습니다. ‘광야와 우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입니다(롬8:28). 광야에 살아도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는 우리를, 안온하며 창창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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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요셉 김영민 | 작성시간 13.02.27 그리고 질문?: 결국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것처럼..이스마엘의 하나님과 이삭의 하나님이 같은 분이니, 아랍민족의 하나님도 우리의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시지요?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못 믿으니..완전하지는 않지만요.. 설명해 주세요..
  • 답댓글 작성자김영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2.27 1. 결론을 말하면 다릅니다. 우리가 성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개체로서 존재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기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 성령 삼위가 일체이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성자와 성령과 따로 존재하는 성부 하나님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이슬람 신자들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열조로 여긴다고 해서, 알라가 우리가 믿음으로 고백하는 성부 하나님과 같지는 않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김영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2.27 2. 다만, 이슬람교를 함부로 폄하하거나 적대시할 순 없습니다. 7세기 이슬람교가 시작됐던 것은 아랍 지역의 기독교 지주들의 악덕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마호멧이 이슬람의 깃발을 들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겸허하게 성찰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또 십자군 원정의 역사는 두고두고 아픈 대목이니까요. 이슬람을 사탄시하거나 악의 세력으로 규정하는 것은 대단히 몰염치하고 무지한 행각입니다.
  • 작성자요셉 김영민 | 작성시간 13.02.27 브엘세바를 허락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보듬고 사랑해 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김영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2.28 결국, 사랑이 답이네요. 삼위일체 교리는 다름을 분명하게 적시하지만, 교리가 다름에도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이 진리겠네요. 교리가 아니라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신다는 말씀이, 오늘 이해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니 교리가 다를지라도 사랑하는 것이 자유이겠습니다. 율법을 어겨 간음한 여자를 사랑하고, 안식일을 어기는 한이 있어도 병자를 사랑하는 것, 예수님께선 유대교의 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자유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사건이었네요. 교리는 나를 지켜주고 진리는 타인을 지켜주는 것이겠네요. 귀한 질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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