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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_ 딤전2:1~6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13.05.18|조회수111 목록 댓글 4

바울은 권세자들을 향하여 대립각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13:1) 또 바울은 노예 제도마저 직접적으로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엡6:5) 바울은 세례 요한처럼 헤롯의 권력욕을 질타하지 않았고,(마14:3) 바울은 예수님처럼 헤롯을 당황케 하지도 않았습니다.(눅9:7)

 

그럼에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었고, 로마에서 재판 받고, 감옥에 갇혔습니다.(행21:33;28:16;딤후4:16) 사실상 사형을 언도 받고 죽음의 위기에 처하기도 합니다. 아마 사자 경기장에 섰을 것입니다. 바울은 사자의 이빨을 보았습니다.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딤후4:17) 굶주린 사자 앞에 바울을 세운 사람들은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곧 자신을 죽일 사람들을 위해 간구합니다.(딤후4:6)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petitions)」와 기도(prayers)와 도고(intercessions)와 감사(thanksgiving)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딤전2:2)

 

간구는 탄원입니다. 탄원은 약자를 위해 하는 것인데, 바울은 임금들과 권력자를 위해 하나님께 탄원합니다.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곧 사형당할 바울이 탄원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임금들과 권세들이 탄원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겐 임금들과 권세들이야말로 탄원이 필요한 약자들입니다. 길어야 50년도 가지 못하는 한 줌 권력을 지키기 위해, 복음 전도를 죄목삼아 사람을 죽여야 하는 권세들이야말로 진실로 약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권력을 갖기 위해 사람들을 죽여야 했던 참으로 약한 사람들이 33년 전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에서 최소 200명 이상을 곤봉과 총으로 죽였습니다. 민주주의를 말하니 죽였고, 길을 걸으니 죽였고, 저항하니 죽였고, 도망가니 죽였고, 대학생이여서 죽였고, 고등학생이여서 죽였고, 엄마 뱃속에 있어서 죽였습니다. 죄목은 여러 가지였지만 진짜 이유는 전라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특정지역의 사람들을 죽여야만 권력을 차지할 수 있는, 아주 약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권력을 차지했고, 이런저런 방법으로 권력을 재창출하며 여전히 임금노릇 하지만, 33년이 지나도록 그들은 여전히 약합니다. 조선·동아일보의 종편은 곤봉과 총에 맞아 죽은 사람들을 빨갱이라 하고, 정부는 기념식장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못하게 하고,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여태 사과하지 않습니다. 약하기 때문입니다.

 

1980년 5월 28일자 조선일보 1면

 

우리는 약한 저들을 위해 간구해야 합니다. 저 약한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탄원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위해 탄원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죽임당한 사람이 아니라, 죽이는 사람들이 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 해도 살인자를, 아니 살인마를 위해 탄원하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살인자를 위해 탄원하신 예수님은 그래서 하나님이십니다. 해야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처럼 살인마를 위해 탄원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친구라 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15:14~15) 우리를 친구라 부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친구입니다.

 

바울도 예수님의 친구였기 때문에, 사자 아가리(Lion's mouth) 앞에 자신을 세운 ‘임금들’과 ‘권세들’을 위해 간구하며 탄원했던 것입니다. 저 권세들과 권세의 개들이 33년이 지나도록 철들지 못하는 이유는 저들을 위한 우리의 탄원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2013년 5월 18일 저녁, 비가 내립니다. 채 시들지 않았는데, 꽃 모가지 또 떨어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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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용감하게 명랑해 | 작성시간 13.05.27 아멘 할 수 없어, 한 주 괴로웠습니다. '정신적 승리'라말하는 자기합리화와 무엇이 다른가요? 고민이 깊어집니다.
    고비마다 분노를 삭혀야 하는 그 많은 생존자들과 가족들은 어떻게 해야하는지, 나의 분노와 고민을 그대로 밀봉한채 일상을 버티는 듯 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김영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5.27 1. 희생자들의 가족에게, 기도하라 설교한다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겁니다. 가해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는 것은 우리 교회를 향한, 어쩌면 저를 향한 지침일겁니다.

    그럼에도 저는 기도하지 않고 있습니다. 설교한 후에도, 한 번도 진지하게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가해자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말과 행동이 다르지요. 제 한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저는 정신적 승리 하지 못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김영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5.27 2. 다음 주(6월2일)에, 저는 또 설교해야 합니다. 나라를 잃고 타국의 노예가 된 사람들을 소개하며, 저들이 해야 했던 것이 결국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었다라구요. 비통함 중에 찬송하는 것이 무엇인지 저는 잘 모릅니다.

    모르는 것을 설교해야 하고, 설교한 것을 행동하지 못하는 것이, 지금 제 수준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제 역량과 수준에 관계없이 '저들을 위해서도 간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읊을 수 있을뿐,이구요. 아직 죄송합니다.
  • 작성자hanna | 작성시간 13.05.28 아....이리도 솔직하신 민들레 목사님! T.T 그래서 설교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선포하는 것'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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