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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는 타버리고 몸뚱이만 남았을 때에 _ 시146편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13.06.02|조회수179 목록 댓글 0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 왕 시드기야를 끌고 갑니다.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더라”(왕하25:7) 왕이 끌려갔습니다. 왕은 국가 안보를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국가 안보를 책임지는 사람이 지금, 없습니다. 단순 유고 상황이 아니라, 외국 군대에 끌려갔습니다. 왕이 외국 군대에 끌려갔다는 것은 국경이 열렸다는 것이요, 국왕이 국경 너머로 끌려갔다는 것은 나라가 망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시인이 기도하기를,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시146:1~2) 왕이 끌려갔는데, 찬양합니다. 왕은 끌려갔지만, 하나님이 왕이십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시145:1) 왕이 없을 때에도, 이스라엘 공동체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이셨고,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들이 국경을 지켰기 때문입니다.(삿14:6) 하나님이 왕이시니 굳이 다른 사람을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시146:3~4)

 

왕이나 국경은 어차피 없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던 태초의 세상에는 국경도 없었고 왕도 없었습니다. 없었던 것이 역사 속에 잠시 있었다가 사라진 것일 뿐, 왕이 끌려갔다 해도 세상은 여일하니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성전은 다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현존을 증명하는 공간입니다. 성전의 두 기둥이 뽑혔습니다.(왕하25:13~17) 성전의 두 기둥, ‘야긴’과 ‘보아스’(왕상7:21)가 노획물 신세가 되었습니다. ‘야긴’은 ‘저가 세우리라’는 뜻이요 ‘보아스’는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이건만, 그 성전의 기둥들이 바벨론 사람들의 노획물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무너졌다는 반증이요, 하나님의 무능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성전에 갇혀 계시지 않고 성전 자체가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스데반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행7:48~49) 성전의 크기는 측량 가능 하지만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측량할 순 없습니다.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시145:3) 솔로몬 성전은 길이가 30m, 너비가 10m, 높이가 15m밖에 되지 않습니다.(왕상6:2)

 

솔로몬 성전은 300 제곱미터, 90 평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측량 가능한 것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측량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측량 가능한 성전에 계셨을 리 만무합니다. 혹 솔로몬 성전이 어마어마하게 컸더라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보다는 작고, 바다에는 미치지 못하고, 하늘에는 닿지 못하는데, 그 성전이 하나님의 존재를, 하나님의 능력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성전 또한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좋은 세상에 존재했던 것이 아닙니다. 보이는 성전은 없었던 것이요, 본래 없었던 것이 역사 속에 잠시 있었다가 사라진 것일 뿐, 성전이 무너졌다 해도 세상은 여일하니,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늘이 땅에 포개지기 전까지, 상황은 늘 좋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일해도 전세를 면하기 어렵고, 학자금 대출 없이 아이들 가르치기 쉽지 않고, 청년에겐 전망이 보이지 않고, 가족·이웃 관계도 깨졌고, 오래도록 박혀 있는 묵은 가시에 심장이 누렇게 곪아갑니다. 찬송은, 시인처럼 ‘이와 같은 때에’ 하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그래서 바라는 모든 껍데기들이 우리를 보호하지 못할 때에, 태초에 창조되던 그 때처럼 우리 붉은 몸뚱이만 남았을 때에, 그 때에 우리를 보시고 심히 좋았다 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껍데기를 너무 좋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껍데기 없이 ‘흙’으로 만들어진 우리 몸뚱이를, 보시기에 좋다 하십니다.(창1:31) 껍데기가 다 타고 붉은 몸뚱이만 남을 때까지 하나님의 불, 성령의 불은 탈 것입니다.(욥1:21) 왕이 끌려가고 성전이 무너지는 것 같은 나쁜 상황들이 우리에게도 있었고, 있을 것입니다.

 

삶은 어렵습니다. 흙이 금이 되도록 우리 몸뚱이는 고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 성령의 불이 심판하듯 우리의 껍데기를 태울 때에, 감사하겠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향한 성령의 불에 풀무질 하듯 최선을 다해 가쁜 숨으로 찬송하겠습니다. 껍데기는 타버리고 몸뚱이만 남았을 때에, 하나님에게도 사람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순금 같은 사람으로 완성되는 것이 우리의 기도이며 하나님의 뜻입니다.

 

기도는 응답될 것이요, 뜻은 성취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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