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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은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_ 행3:1~10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13.06.16|조회수115 목록 댓글 1

사두개인들은 대대로 제사장직을 물려받으며 성전을 통해 부를 누렸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계셔야한다는 것이 사두개인들의 이데올로기였습니다. 그런데, 「성전 밖에서」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걷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행3:2,8)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걷게 된 이유가 부활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것이라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부활했고, 부활한 예수가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걷게 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거든요.(행4:2;23:8) 「성전 밖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사두개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그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을 보고 있습니다.(행4:14)

 

예수님은 분명 죽었었지만, 예수님은 지금 로마 군대의 포승줄이 닿을 수 없는 하늘에 계시며,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통치하십니다.(히12:2)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전 밖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행3:3)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전 밖에서」,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는 것은, 성전을 숭상하는 사두개인들에게는 불편한 진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지만, 성전은 A.D.70년, 로마 황제의 아들 ‘티투스’의 군대에 의해 무너졌습니다.(마24:1~2) 로마 군대의 힘을 빌려 예수를 죽였던 사두개인들은 로마 군대에 의해 삶의 근거를 잃었습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에 망합니다.(마26:52) 성전이 무너진 후 제사장직을 독점하던 사두개인들은 해산되었습니다. 보이는 것은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각종 이단들이 난립해 있습니다. 초대교회 때에도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있었습니다. 영지주의는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모든 것을 악한 것이라 여기는 태도입니다. 영지주의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물질세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창조된 물질세계를 악하다고 생각하는 영지주의자들 때문에 초대교회는 ‘천지의 창조주’를 고백하며 사도신경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특이한 것은, 영지주의 이단은 조직화된 단체나 세력이 아니라 ‘교회 내에 믿는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흐름’이라는 것입니다. 골라내려고 해도 골라낼 수 없고 집어내려고 해도 집어 낼 수 없는 일종의 신앙 패턴이 영지주의였습니다.(마13:29)

 

초대교회 시대 영지주의처럼, 골라낼 수 없고 집어낼 수 없는 우리 시대 가장 강력한 이단은 ‘성전주의’입니다. A.D.70년, 성전이 파괴되면서 사두개인들은 해산되었고, 성전주의라는 이데올로기도 추락했건만, 오늘날 성전주의는 부활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두개인들의 이데올로기가 오늘날 우리의 신앙패턴으로 부활했습니다. 보이는 건물인 성전이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면 우리는 이단입니다. 보이는 건물인 성전이 있어야 사람이 모일 수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이단입니다. 보이는 "은과 금"이 있어야 안정감을 갖는다면 우리는 이단입니다.  A.D.70년, 성전은 무너졌는데 사두개인의 피는 우리 몸속을 흘러, 우리는 보이는 것에 집착합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사두개인의 전통을 부활시켜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사두개인의 믿음은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었고, 예수를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히11:1)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습니다.

 

인생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위태한 것 같지만,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진실로 구원의 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보이지 않을 만큼 좁은 길입니다.(마7:14) 출애굽의 길은 보이지 않았지만 “바다 가운데 마른 땅”이 있었지요.(출14:16)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는 40세였습니다.(행4:22) 40세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지냈던 40년을 상징합니다. 하늘을 의지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40년 동안 보이지 않는 길을 걸었던 이스라엘에 ‘땅’을 주신 것처럼, 보이지 않는 길을 걷는 자에게 “아버지의 나라가” 올 것입니다. 아무리 걸어도 모래 바람에 자취가 남지 않는 광야 길을 가는 사람들, 걸어도 걷는 게 아닌 듯 진보하지 않는 것 같은 인생길 가는 사람을, 예수님께서 일어나 걷게 하십니다.(행3:6) 보이는 “은과 금”을 지니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생기"를 호흡하는 까닭에 찬송합니다.(창2:7;겔37:5)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할렐루야”(시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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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용감하게 명랑해 | 작성시간 13.06.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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