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밤하늘을 가리면, 배는 길을 잃는다. 별빛 없는 밤바다로 등대가 던지는 빛줄기는 생명줄이다. 옛날 광야를 지나던 나그네에겐 상수리나무가 등대였다. 상수리나무가 선 즈음에 마을이나 장막이 있어 물을 마실 수 있고 빵을 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상수리나무는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구원의 장소여서 스승, 마법사, 점쟁이 등의 뜻을 갖는 ‘모레’라는 별호가 붙었을 것이다. 부름을 받아 광야로 나선 후 만났던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은 이유도 지나온 광야 길이 살길이었고, 이제 닿은 곳이 살 곳이라는 감사의 표현이었다(창 12:6-7).
상수리나무 아래에 서서 다시 길을 나설 때면, 순종하는 마음과 불안한 마음이 얽히고설켜 진정 길을 나서야 하는지 묻고 물으며 망설였을 것이다. 이렇게 길이 위험한 줄 알기에 아브라함은 나그네였던 때를 기억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상수리나무를 응시했을 것이다. 행여 지나가는 나그네를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 상수리나무를 보는데, 세 사람이 다가왔다. “달려 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그들을 맞이한다.
무리요(Bartolom Esteban Murillo, 1617-1682)는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무릎을 꿇고 청년을 영접하는 노인 아브라함을 그린다. 노인이 청년들의 발을 씻겨 주고, 나무 아래에 쉬게 하고, 떡을 먹여 배부르게 한다(창 18:1-5). 나그네라면 청년이라도 존중받고 노인이라도 무릎 꿇어 나그네를 접대한다.
나그네가 존중받고 대접받아야 하는 이유는, 불안하나 순종하며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신을 길이라 하셨다. 그리고 길과 진리와 생명이 한 가지 뜻이라고 가르치셨다(요 14:6). 길 위에 있는 나그네는 진리를 알고, 생명을 담은 존재들이라 존중받고 접대받아 마땅하다. 광야엔 길이 없다. 나그네는 길이 있어 가는 게 아니라 길을 내며 광야를 걷는다. 해서 나그네는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뜻을 고지하는 천사다. 나그네를 손님으로 맞아 대접하는 것은 그 천사들을 대접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히 13:2).
따지고 보면 모든 사람이 다 나그네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다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아 내며 누구도 살아보지 못한 내일을 맞이한다. 생명, 살아 있으라(生)는 명령(命)에 순종한 까닭에 길 위에 있는 사람은 하루하루 불안하다. 그 불안의 한 조각은 순종하며 길을 나선 나그네의 심장을 뛰게 하는 에너지가 된다. 불안하기에 해지기 전 한 걸음이라도 더 걷게 된다. 불안한 까닭에 한 걸음 더 걷다 보면 상수리나무 서 있는 땅에 하루 더 빨리 닿지 않을까. 하나님께 순종해 길을 나선 천사라도, 여느 나그네처럼 불안 속에 길을 걸었을 것이다. 불안의 끝자락에 잎이 무성한 나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