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아기 예수를 축복하며, 고통과 위험에 대해 말한다.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눅 2:34-35).
분명 축복일 텐데, 저주처럼 들린다. 아기에게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된다는 게 축복은 아니다. 엄마에겐 ‘칼이 네 마음을 찌를 것’이라니, 이게 과연 축복인가. 30여 년이 지난 후 예수는 예언대로 종교 지도자, 로마 관료, 심지어 제자에게까지 ‘비방받는 표징’이 됐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아들을 봐야만 했다. 예수의 손목과 발목에 박힌 못은 마리아의 마음에 박힌 ‘칼’이 됐다. 갓 태어난 아기와 엄마를 향한 시므온의 축복은 안타깝게도 성취됐다.
시므온은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눅 2:25). 시므온이 아기와 엄마에게 고통과 위험에 관해 예언한다. 예언은 모순이지만 거짓이 아니다. ‘위로’를 기다리는 자가 예언한 ‘고통’과 ‘위험’은 참혹한 역설이다. 시므온이 ‘고통’과 ‘위험’을 예언함은, ‘성령의 지시’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성령의 지시’에 따라 예언된 고통과 위험은 분명 닥칠 것이다(눅 2:25-26). 성령께선 ‘위로’를 기다리는 자에게 ‘고통’과 ‘위험’을 예언하도록 몰아가신다.
고통과 위험을 피할 수 없을까. 아기는 ‘비방받는 표적’이 되고, 엄마의 마음은 ‘칼’에 찔릴 것이라는 저주같은 축복을 피할 방도는 없다. 장차 일어날 사건을 주목하면 저주 같지만, 사건을 헤쳐 나갈 사람을 생각하면 축복이다. 고통과 위험을 안겨 줄 사건을 피하게 하시진 않으나, 아기는 자라며 강해지고 지혜와 은혜로 고통과 위험을 감당할 사람이 된다(눅 2:40). 피할 수 없는 고통과 위험을 안겨 주는 사건은 저주 같지만, 사건을 제압할 수 있어 축복이다.
사건과 사건을 만나며 고통과 위험이 동반한 순간 순간을 지나곤 한다. 사건들은 저주 같지만, 사건을 통과하고 생기를 호흡하는 사람은 축복이다. 렘브란트가 죽었을 때, 팔리지 않거나 미완성인 작품들 속에서 〈성전에 있는 시므온〉이 발견됐다. 그림 속 시므온은 눈동자가 눈꺼풀에 거의 덮여 있다. 아기 예수를 보지 못한 채, 장차 있을 일을 보이지 않는 눈으로 응시한다. 아기 예수가 시므온을 바라보는 눈빛 덕에 시므온의 낯빛이 환하다. 시므온은 죄인이 포승줄을 받듯 손을 내밀고, 그 손에 예수가 안겨 있다.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오래 위로를 기다려 왔던 사람 시므온을 이렇게 위로하신다. 포승줄에 잡혀가야 한다고 여기는 시므온을, 아기 예수가 온몸으로 포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