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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通 민들레(사랑방)

보티첼리, 수태고지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26.05.01|조회수17 목록 댓글 0
산드로 보티첼리, 수태고지 Annuciation, 1489년, 패널 위 템페라, 150×156cm,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테라스 밖으로 높다란 나무가 서 있다. 안개도 나무를 가리지 않고, 구름도 나무에 걸리지 않았다. 하늘이 맑다. 이렇게 맑은 날 가브리엘 천사가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을 들고 마리아에게 와서 임신 소식을 알린다.

 

, 그대는 아이를 가져 아들을 낳을 겁니다. 이름을 예수라고 하세요.(1:31).

 

순결한 처녀 마리아에게, 약혼한 마리아에게 회임을 고지하는 건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다.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법이 그랬다.

 

한 남자와 결혼하기로 약속한 젊은 여자가 있는데, 다른 남자가 도시에서 그를 만나 그와 함께 누웠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둘을 그 도시의 성문으로 끌어내어 돌을 던져 죽이도록 하십시오. 그 젊은 여자는 도시 안인데도 소리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 남자는 이웃의 여자를 욕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나쁜 짓은 그대 이스라엘 가운데서 뿌리 뽑아 버리도록 하십시오.”(22:23-24).

 

마리아가 임신해 배가 불러오면 누가 마리아의 순결을 믿겠는가.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마리아의 진술을 어느 재판관이 받아들일 것인가. 법대로라면 약혼한 마리아는 간음죄로 돌에 맞아 죽을 것이다.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는 수태고지를 그리면서 천사 가브리엘을 거의 화면 중앙에 배치했고 마치 마리아를 향해 뛰어나갈 듯한 자세로 그렸다. 마리아는 곧 달려올 것만 같은 가브리엘을 피해 그림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듯 몸을 틀어 돌린다. 마리아는 두 손으로 완강하게 가브리엘을 거부한다. 눈을 감고 입술은 닫아 더 이상 들을 말도 할 말도 없다는 투다. 왜 그러지 않겠는가. 천사 가브리엘의 전언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요, 마리아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다. 운이 좋아 돌에 맞아 죽지 않는다 해도 당연히 파혼당할 것이다. 아비가 누군지 말할 수 없는 자식을 키워야 한다.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말을 누가 믿어 주겠는가.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영접하는 사건을 치욕적이고 위험한 것이었다.

 

지금 우리가 예수를 영접한다해서, 치욕 당할 일도 없고 위험하지 않다. 좋은 시절이다. 그런데 말이다. 어쩌면 예수를 제대로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치욕적이지 않고 위험하지도 않은 건 아닐까. 예수께서 내 안에 제대로 착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 흔한 입덧도 없이 그저 평안하게 사는 건 아닐까.

 

가깝게 지내던 세례 요한이 참수당했음에도 헤롯을 향해 여우라 칭하며,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등 종교 지도자들과 충돌하고, 여론 따위 아랑곳하지 않아 매국노 삭개오마저 친구 삼으며, 끝내 제자들에게 배반당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를, 영접할 수 있는가. 나는 몸을 틀어 그림 밖으로 도망갈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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