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26년 6월 22일, 크게(大) 잇는다(連)는 뜻을 지닌 도시 다롄(Dàlián,大連)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1910년 3월 16일 안중근이 처형됐던 뤼순 감옥이 있는 곳이다. 안중근이 뤼순 감옥에서 집필했고 미처 다 쓰지 못한 《동양평화론》을 후대가 이어쓰려면, 한반도가 먼저 은행·군대·회의를 함께하는 국가연합을 먼저 이뤄야할까. 형식이나 방식이야 한 가지가 아니겠지만, 동양평화가 완성되려면 한반도 평화가 먼저겠다. 한반도와 중국·일본을 평화의 실로 크게(大) 잇고자(連) 했던 안중근이 다롄에서 처형되는 모순은 언제쯤 역설이 될까.
0-2.
엔도 슈사쿠(遠藤周作,1923-1996) 는 어린 시절 일본 조차지였던 다롄에서 살았다. 다문화도시였던 다롄에서 여러 경계인들을 만났겠다. 다양한 문화 배경을 지닌 사람들을 접한 경험 덕에, 일본에서 소수자인 천주교 신앙을 지닌 작가로 독특한 작품을 써냈던 게 아닐까.
경계인으로 사는 사람은 자기를 드러낼 때, 타인의 공간을 확보한다. 타인에게 내준 자리만큼만 자신이 차지한다. 되도록 작게 존재해야, 타인의 공간을 내줄 수 있고, 서로 상하지 않는다. 다양한 문화를 지닌 사람들과 더불어 살려면 바늘처럼 작게 존재해야 한다. 바늘만큼 가늘고 작게 존재하면 크게(大) 이을(連) 수 있다. 바늘은 가늘어서 약하고 차지하는 공간이 작기에, 바늘보다 더 가는 실의 휘어진 몸통을 잡아준다. 또 바늘은 날카롭게 반짝이며 작은 틈을 찾아 돌파한다. 엔도 슈사쿠는, 신앙을 가졌으되 비루하고 비겁해 실처럼 가늘게 길게 사는 사람들을 주인공삼는다. 예수처럼 굵고 짧게 살지 못하는, 예수를 믿고 따름으로 멋있게 순교하지 못하는, 의혈을 흘리며 죽지 못하는,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 엔도 슈사쿠의 주인공들이다. 엔도 슈사쿠의 바늘은 실처럼 가늘고 꼿꼿하게 서지 못하는 사람들 몸통을 꿰고 완고한 장막을 돌파하며, 반짝인다.《위대한 몰락》과 《침묵 》에서 가늘고 길게, 비루하고 비겁하게, 인생과 신앙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내 환한 초상이다.
0-3.
선과 악의 경계지대(Borerland)가 하ᄂᆞ님나라,다. 스스로 선한 사람으로 불리는 걸 불편해하는 예수의 마음이 그리스도다. 부자 청년이 예수에게 어떻게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여쭐 때, 예수를 선한 선생님이라 불렀다. 예수는 자신을 향해 선하다고 부르는 청년을 경계한다. 하ᄂᆞ님만이 선하기 때문이다.(마가복음10:17~22) 땅에 태어나 발을 딛고 살아왔기에 하ᄂᆞ님으로 존숭받는 예수도 선하지 않다. 땅에 발딛지 않은 채 하늘에 계신 하ᄂᆞ님만이 선하다. 선(ἀγαθός,善)이란 땅에서 알 수 있거나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어서, 사람은 지닐 수도, 경험할 수도 없는 가치다. 사람은 그저 선과 악의 경계에서 분투할 뿐이다.
0-4.
선을 깃발 삼아 구원을 바라는 부자 청년에게 예수는 소유를 내놓고 동행하자 하신다. 크고 두터운 소유를 내려놓고 바늘처럼 작고 가늘어지라 하신다. 누군가를 구원하는 사람이라야 구원받는다. 구원받고자 하면 구원해야 한다.(마태복음7:12) 소유를 내놓아야 실같은 사람을 꿰어 안을 수 있다. 부자가 소유를 내놓아 빈자를 구원할 때, 서로를 구원한다.
0-5.
선과 악의 경계에서 선의 척력에 감히 맞서고 악의 인력을 힘써 뒤로하며, 소유를 사람들을 구원하기위해 내놓으며 순례하는 이에게 구원이 열린다.
0-6.
모두에게 햇빛을 비추고, 비를 내려주는 하ᄂᆞ님만이 선하다는 믿음으로 사람은 정의로울 수 있다. 선한 사람이라 착각한 채 악과 싸우는 건 정의가 아니다. 내 안에 뽑히지 않는 악을 인정하고, 그악한 사람도 품고있는 선을 긍정하는 마음이 그리스도다. 안중근이 일본인 포로를 살려준 마음이 그랬겠다. 일본군 포로라도 사람이기에 그 악에 선이 섞여 있어서, 일본군이라도 국제법 보호를 받아야한다는 게 안중근의 믿음이었다. 그 믿음때문에 안중근의 동지들은 일본군에 죽임당했다. 동지들의 죽음 위에서, 안중근은 자신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기로 결정하지 않았을까.
0-7.
이토 히로부미라는 사람에게 또아리튼 거대한 용이 내뿜는 화염으로부터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짐승 이토를 총쏴 죽인다. 안중근에게 일본군 포로를 살려주는 마음과 일본군 수괴를 죽이는 마음이 한가지다. 당시 천주교회 주교였던 뮈텔(1854-1933)은 사형 앞둔 안중근을 천국으로 이끄는 기도를 금한다. 안중근이 그 믿음때문에 종교로부터 버렸다면, 안중근은 분명 구원 받았겠다. 기독교로부터 버림받아야 기독교인이다.
1.
다롄 역사에 있는 식당에서 우육면으로 점심. 고추기름으로 느끼함을 줄이고, 향채로 고기 잡내를 덮는다. 현지 식물을 몸 속에 담을수록 낯선 땅에 익숙해진다.
2.
중국에선 화장실을 위생간(衛生間)이라 적는다. 위생이란 말뜻이, 생명(生)을 지키는(衛) 것이다. 위생간이란 이름짓기는 몸 속 남은 것을 비우는 일이 생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알려준다. 몸 속에 쌓인 것을 버릴 때 삶은 이어진다.
3-1.
다롄에서 단둥으로 가기 위해 역에 들어가며 검색대를 통과한다. 중국 모든 기차역에서 중국인들도 검색을 받는다고 한다. 중국 당국은 먼길 가는 모든 사람들의 이동경로를 파악한다.
단둥(Dāndōng, 丹东)으로 가는 승차권에 여권 이름이 박힌다. 검표구에 승차권이 아니라, 여권을 대며 통과한다. 기차 승차권을 구입한 사람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 정밀하게 파악된다. 중국이 내국인 공민과 외국인 여행객을 통제하는 방식이다. 디지털 세상에서 중앙 권력에 감시당하기가 오히려 쉽디. 디지털 시대야말로 '빅 브라더'에 의해 용이하게 감시당할 수 있다는 걸, 중국 기차역에서 새삼 확인한다.
3-2.
한자로 쓰인 승차권을 꼼꼼히 읽지 않고, 숫자만 확인하며 좌석을 찾았다. 14B였다. 14B 자리에 중국 여성이 앉아있어, 그 앞에 서서 승차권을 보여주니, 웃으며 내 승차권을 빼앗듯 가져가더니 다른 자리로 안내한다. 분명 내 자리가 14B인데,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자기 자리와 바꿔버리는 거 같아 언짢았다. 어쩌겠는가. 중국어를 못하는 외국인이 중국 기차에서 말이다. 앉아 갈 수 있으면, 그걸로 된거지, 그냥 고분고분 따르기로 하고 바뀐 자리에 앉았다. 바뀐 자리에 앉아 승차권을 다시 찬찬히 보니, 좌석번호가 아니라 검표구가 14B다. 중국어를 모르는 외국인을 위해, 굳이 통로를 앞장 서 걸어 자리를 찾아준 친절을 무례로 오해한 것이다. 민망했지만 자리도 제법 떨어져있고 상황을 설명할 재간이 없어, 그 쉬운 '쎼쎼'도 말하지 못했다. 기계 속에 살아도 환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중국 기차간에서 새삼 확인한다.
4.
어두워지기 전에, 단둥에 닿았다. 김포에서 서울지나, 인천에서 비행기타고, 다롄에서 기차타고, 단둥까지 왔는데, 아직 환하다. 사열하는 군인들같이 걸으라 강요하는 신호등 초록불이 거슬리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우린 각자 보폭으로 걷는다. 함께 걷는 환한 사람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