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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동영상

[2025예산수정][주일설교 2025.7.27] 누가복음 6:1~11 풍성한 생명을 누리려면 | 예산수정교회 이몽용목사

작성자암행어사|작성시간25.07.28|조회수62 목록 댓글 0

https://www.youtube.com/watch?v=BEPrbNUt_rw&t=1s

 2025년 7월 27일(주일설교)  제목: 풍성한 생명을 누리려면 
 본문: 누가복음 6:1~11 (개역개정) 예산수정교회 이몽용 목사 

서론
사람들은 누구나 풍성한 삶을 원합니다. 더 많은 재산, 건강, 여유, 안정된 관계…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풍성한 생명은 단순한 외적 넉넉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참된 기쁨과 자유, 그리고 내적 충만함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단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생명을 더 풍성하게, 더 깊이, 더 넓게 누리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 복음은 단지 죄 용서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시는 동시에, “생명”을 더 풍성히 누리도록 부르십니다.
* 생명의 풍성함은 관계에서 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얻어지는 내적 변화와 진정한 만족입니다.
* 생명의 풍성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입니다.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는 표현은 마음과 삶의 영적 자유와 영양 있는 영적 양식의 섭취를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6:1~11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안식일 논쟁 속에서 율법보다 생명, 형식보다 회복, 체면보다 사람을 먼저 보신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진정한 생명이 무엇인지, 또 우리가 그 생명을 어떻게 누릴 수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 “풍성한 생명을 누리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세 가지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율법보다 율법의 정신을 먼저 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1~5절)
※ 예수님께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 하신 선언은, 율법의 정신, 즉 사랑과 생명, 긍휼, 을 온전히 아시고 완성하실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율법보다 율법의 정신을 먼저 보는 삶은 바로 예수님을 율법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따르는 삶으로 연결됩니다.
제자들은 시장하여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었습니다. 
제자들은 배가 고팠습니다.  여행 중에 식량이 부족했을 수도 있고, 이른 아침이라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그들은 굶주림을 느꼈고, 눈앞에 보이는 밀 이삭을 통해 허기를 채우고자 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행위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제자들의 행동은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로 비춰졌습니다. 그들은 2절에서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라며 비난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은 율법 조항을 철저히 지켜야 하는 날이었고, 그들의 기준에서 이삭을 자르는 행위는 ‘추수’에 해당되어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이 행동은 율법 안에서 허용된 일이었지만,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안식일을 범하는 행위’로 몰아 정죄합니다. 바리새인들의 관심은 사람의 필요나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라, 자신들의 율법 해석과 외적인 규칙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윗이 제사장의 떡을 먹은 사건을 예로 들어, 율법의 본질은 생명을 위한 것이며, 안식일도 사람을 위해 있는 것임을 밝히십니다.
다윗 역시 쫓기는 상황 속에서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었던 전례를 언급하며, 율법의 문자적인 해석보다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다윗의 이야기는 4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예수님은 다윗의 행적을 통해, 생명의 위협 앞에서 율법의 형식보다 인간의 생명을 먼저 구해야 하는 상황이 있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율법의 정신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사랑과 긍휼, 회복과 생명 중심의 마음입니다.
 
첫째, 율법의 정신은 사랑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롬 13:8-10)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예수님께서도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다음의 두 계명에 걸었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37-40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따라서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 사랑, 그리고 이웃 사랑으로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둘째, 율법의 정신은 긍휼입니다
예수님은 외적인 율법 행위에 집착하고 긍휼을 놓친 바리새인들을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렸도다.”
호세아 6:6 “나는 인애(긍휼)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이 구절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9:13과 12:7에서 직접 인용하시며, 죄인을 부르러 오신 목적, 안식일의 참 의미 등을 설명하십니다. 즉, 율법은 단지 의식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긍휼한 마음을 알게 하려는 도구입니다.

셋째, 율법의 정신은 회복입니다.
율법은 단지 죄를 드러내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죄인을 돌이켜 회복시키려는 도구입니다.
신명기 30:2-3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의 말씀을 청종하면… 네 포로를 돌이키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갈라디아서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율법은 인간의 연약함과 죄를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 회복받도록 돕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길잡이입니다.
넷째, 율법의 정신은 생명 중심입니다
율법은 인간을 억압하려는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신명기 30:19-20 “내가 오늘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
레위기 18:5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마 5:17 예수님께서도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고, 그 완성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생명의 길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억누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호하고 이웃과의 삶을 지키기 위한 경계선입니다. 율법의 목적은 단순한 행위 규제가 아니라, 생명을 보존하고 사랑을 실천하게 하는 도구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시며, 율법의 진정한 해석자이자 완성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겉모양은 지켰지만, 율법의 정신은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그 결과, 생명을 회복하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생명을 정죄하고 가로막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정작 율법의 정신을 잃어버리면, 사람을 살리기보다 죽이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율법주의는 언제나 사람을 멀게 하고, 생명을 말라가게 합니다. 풍성한 생명을 누리려면, 율법보다 율법이 의도한 하나님의 긍휼과 생명의 목적을 먼저 바라보아야 합니다.

2. 생명을 살리는 일에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6~10절)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시어 가르치셨고, 거기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상황을 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하고 엿보며 정죄의 기회를 노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속마음을 아시고, 병든 자를 앞으로 나오게 하신 후 모든 사람 앞에서 물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9절)
이 질문은 단지 논쟁을 위한 질문이 아니라, 청중 모두가 선택해야 할 생명의 기준을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계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기 위해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는지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어느 누구도 공개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다'고 말하지 못하고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안식일 규례에 갇혀, 고통받는 한 사람의 회복보다 전통과 규율을 더 중요시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이 침묵은 단순한 조용함이 아니라, 두려움과 위선, 종교적 형식주의에 사로잡힌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침묵하며 외면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 고통의 한복판으로 나아가십니다.
예수님은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시며, 단지 말로만 동정하거나 위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행동으로 생명의 회복을 실현하셨고, 실제로 마른 손을 고치셨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머리로 이해하거나 마음으로 느끼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현실 속에서 결단하고, 불편을 감수하고, 행동하는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논쟁으로 인해 생길 갈등과 비난을 아셨지만, 한 영혼의 회복이 그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에 행동하셨습니다.

결국 이 장면은 우리에게 이렇게 도전합니다:
“너는 생명을 살리는 자인가? 말만 하고 있는가? 아니면 예수님처럼 용기를 내어 직접 행동하고 있는가?”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현장을 보고도 마음이 닫혀 있었고, 치유받는 사람보다 자신들의 체면과 체계가 무너지는 것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생명을 거절하고, 결국 스스로 멸망의 길로 가는 어리석음입니다.
예배 자리에 있으면서도 은혜 없이 비판의 눈으로만 사람들을 바라 본다면, 결국 바리새인들과 같이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는 커녕 자신의 영혼도 병들고 메말라지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도 생명을 살리는 자리로 부름 받았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누군가를 살리고 세우는 자리로 보내고 계십니다."
그것은 거창한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가까운 이웃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는 일,
낙심한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일,
외면당하는 이에게 다가가 손잡아 주는 일도
생명을 살리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처럼 누군가의 고통을 보고 외면하지 않고,
“그 사람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어?”라고 말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마음을 내고, 행동하는 것,
그것이 바로 ‘생명을 살리는 자리’에 응답하는 삶입니다.
현실에 더 구체적으로 적용해 보면? 
친구나 가족이 힘들어할 때 무관심하지 않고 귀기울여 들어주는 것도 생명을 살리는 자리에 응답하는 삶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소외된 사람에게 먼저 인사하고 다가가는 것도 그렇고, 
진리를 알지 못하는 이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랑으로 전하는 것도 그렇고, 
직장이나 교회, 이웃에게 용서와 격려의 말을 건네는 것도 생명을 살리는 자로 나를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매일 작고 평범한 자리를 통해서도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사람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3. 거절과 적대 앞에서도 생명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11절)
이 구절은 단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분노를 보여줄 뿐 아니라, 그 거절과 적대 앞에서도 예수님께서 끝까지 생명의 길을 선택하신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반대와 비난 속에서도 위축되거나 타협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생명을 회복하시며,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십니다. 예수님께서 거절과 적대 앞에서의 생명의 길을 선택하는 태도는 ? 
첫째, 예수님은 위축되지 않으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고, 비난하려는 눈빛이 가득했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과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계셨기에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행하신 분”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날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형식적인 전통보다 생명을 우선시하셨고, 사람을 살리는 일이 옳다면 그 어떤 규범과도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병자의 회복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병을 고쳐주는 능력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시는 순종의 종이셨습니다.
그 뜻은 “죽은 자를 살리고,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시는 것”(눅 19:10)이었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묵묵히 생명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환호받을 때만이 아니라, 비난과 반대 속에서도 사명의 길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그 길은 십자가까지 이어지는 생명의 길이었고, 묵묵히 한 영혼을 품으시며 걸어가셨습니다. 
우리도 복음으로 살아갈 때, 이웃의 비난과 오해, 외면과 반대 속에서도 예수님처럼 사랑과 회복, 진리의 길을 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로운 행동과 말씀 앞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분노에 휩싸여, 예수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의논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 (11절)
예수님을 통해 생명을 본 은혜의 자리가 그들에게는 정죄의 계획을 꾸미는 자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권면 앞에서도 스스로 마음을 닫았고, 공동체의 회복이 아니라 파괴를 꾀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 생명의 길에서 벗어나, 심판의 길로 들어서는 자들이었습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는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첫째는 복음을 전하려고 마음먹었지만, 가족이나 친구가 싸늘하게 반응할 때,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기회를 보아 사랑으로 다시 다가가야 합니다.
둘째, 공동체 안에서 불편한 진리를 말할 때 오해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와 생명을 위한 말이라면 침묵보다 용기가 필요합니다.
셋째, 세상에서 말씀대로 정직하게 살려는 선택이 나의 손해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살리는 삶은 정직과 진실에서 시작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비난보다 생명을 우선시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의 반응보다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십시오.
편안함보다 순종을 택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손해와 외로움 속에서도 진리의 길을 걸으십시오.
두려움보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말과 행동을 결코 멈추지 마십시오.

[큐티인 묵상 간증] “고발이 아닌 고백으로” 이지은 
청년 시절에 수년간 섭식장애의 고통을 겪으며 하나님 앞에 죄인된 심정으로 지낼 때입니다. 저의 연약함과 죄 고백을 듣고도 저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 주는 형제를 만나 하나님의 은혜로 결혼했습니다. 그러다 저의 섭식장애가 낫고 자녀가 태어나자 저는 아이들에게 행복한 가정을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좋은 엄마, 좋은 아빠’라는 프레임이 저와 남편을 가두었습니다. 그러자 육아와 일, 경제적 고난으로 저희 부부는 몸과 마음이 지쳐갔고, 부부싸움은 날로 심해졌습니다. 매주 교회 소그룹 모임에서 나누며 화해했지만, 비슷한 일로 계속 다퉜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부부 갈등의 원인이 깨달아졌습니다. 구원은 행위나 공로로 받는 것이 아닌데, 남편을 행위로 판단하는 저의 죄를 보게 된 것입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사하며 “어찌하여 부모로서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고 하는 제가 바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엄마로서 저도 부족한 점이 많은 데 남편만 정죄한 것입니다. 남편보다 내가 훨씬 더 악하다는 것이 인정되니 남편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주님이 세우신 가정의 질서에 순종하지 못하고 남편에게 복종의 언어를 쓰기 힘들었던 이유를 이제야 깨닫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 앞에서 죄인 된 제 모습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되고 아줌마가 되니 모성애와 더불어 없던 힘까지 생겨 남편을 무시하며 남편에게 저만의 양육 율법을 들이댄 죄를 회개합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남편을 행위로 판단하고 정죄한 것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가정의 질서에 순종하겠습니다. 날마다 말씀 앞에 제 모습을 직면하고, 공동체에 남의 행위를 고발하지 않고 저의 죄만 고백하며 가겠습니다. 
적용1) 가정의 질서에 순종하여 자녀들보다 남편을 우선하고 복종의 언어를 쓰겠습니다. 
적용2) 영적 직분을 감당하는 남편을 도와 저희 집에서 부부 소그룹 모임이 있을 때마다 밥하고 청소하는 것을 기쁘게 감당하겠습니다. 
 
결론 
거절과 적대 속에서도 생명을 선택하신 주님을 따르십시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절과 적대 속에서도 생명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셨고, 회복과 사랑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우리도 그 주님을 따르며, 율법주의와 자기의, 거절과 교만을 넘어서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율법보다 율법의 정신을 먼저 보는 마음,
형식보다 생명을 살리는 예배,
적대와 거절을 넘어서 공동체의 권면에 귀 기울이고 회개하는 삶,
이런 태도를 가진 자는 주님 안에서 날마다 풍성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피 흘려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절대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율법에 갇힌 삶이 아니라, 주님의 긍휼과 생명에 반응하는 삶을 선택하십시오. 진심으로 주님 앞에 나아올 때, 여러분의 삶에는 날마다 회복이 일어나고, 다른 이들을 살리는 은혜도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요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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