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일곱 우뢰의 개봉(開封)

작성자초록색|작성시간09.08.31|조회수24 목록 댓글 0

제목 :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

발행 : 1968년 08월

저자 : 안상홍著

제17장 일곱 우뢰의 개봉(開封)

기록한 바「일곱 우뢰가 발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나며 말하기를 일곱 우뢰가 발한 것을 기록하지 말고 인봉하여 두라」(계10:4) 하시었으니 일곱 우뢰를 영원히 봉한 대로 있을 것인가 다시 개봉(開封)이 될 것인가?
성경의 기록한 말씀 중에 뜻이 없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인봉하라고 하신 뜻은 개봉할 때가 있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계시록 10장 4절에 봉하라 하신 일곱 우뢰는 계시록 10장 7절에 개봉될 때를 가르쳐 주고 있다.
이 비밀은 전에 없던 새 것이 아니라 옛적부터 그 종 여러 선지자들에게 보이신 새 언약의 진리인 것이다.(계10:4, 7 비교)
성경 말씀 중에는 우뢰라는 기록이 여러 곳에 있는 바 요한복음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바로 듣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 음성이 우뢰소리로 들린 것이다.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에「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가로되 내가 이미 영화롭게 하였고 또 다시 영화롭게 하리라」(요12:28) 하신 음성이 들릴 때에도 요한은 그 음성을 바로 듣고 요한복음에 기록하였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우뢰소리로 들렸던 것이다.(요12:29)
계시록에도「하늘에서 소리가 나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계14:2)하였으니「내게 들리는 소리는」하고 구별된 언어로 기록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바로 듣는 사람과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다.
그런고로 다른 사람에게는 일곱 우뢰로만 듣게 되었으나 사도 요한은 그 음성을 바로 듣고 기록하려고 하였으나 인봉하라는 명령이 있으므로 일곱 우뢰라고 기록한 것 뿐이다.
그러면 일곱 우뢰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신·구약 성경 가운데 우뢰라고 기록한 곳이 있으니 어디든지 우뢰 소리가 발하는 곳마다 하나님의 표적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일곱우뢰의 오묘

그러나 일곱 우뢰라고 기록한 것은 일곱에 대한 숫자의 의미가 있는 바 일곱은 완전한 숫자라는 것은 누구나 다 인식하는 바이다.
그런고로 일곱을 완전으로 변경시킨다면 일곱 우뢰가 아니라 완전한 우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어디서 완전한 우뢰가 발하였는가?
이는 한 사람이나 두 사람 앞에서 발하신 우뢰가 완전한 우뢰 소리가 아니라 이스라엘 총회 앞에서 발표하신 우뢰가 완전한 우뢰라고 할 수 있으니 완전한 우뢰소리가 발표된 때는 시내산 화염 중에서 모든 백성에게 우뢰같은 음성으로 언약의 말씀을 발표하신 것이다.(출19:16∼19, 신5:1∼5)
그런고로 일곱 우뢰는 완전한 우뢰를 말하는 바 이 우뢰를 발표하실 때에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과 삼차의 칠개 절기를 정하여 주셨는 바「시내산에 강림하시고 하늘로부터 말씀하사 정직한 규례와 진실한 율법과 선한 율례와 계명을 주시고」(느9:13) 하였다.
그런고로 일곱 우뢰소리만 들을 것이 아니라「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찌어다」(계13:9, 3:22) 하셨으니 우뢰에 대한 원칙을 깊이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성경 말씀 중에는 알기 어려운 문제가 많이 있는 바 침례 요한도 자기가 선지자다 엘리야다 하지 아니하고「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니」(요1:23) 하였다.
누구든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연구한 사람은 그가 주의 길을 예비하러 보내심을 받은 엘리야인줄 알게 되는 것이다.(사40:3∼9, 말3:1, 4:5)
예수께서도 침례 요한이 자기 제자를 예수께 보내어 물어볼 때 내가 그리스도라 하시지 않으시고「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하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한다 하라」(눅7:19∼22) 하심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을 연구한 사람은 알 수 있기 때문이다.(사29:18∼19, 35:4∼6)
이와 같이 우뢰에 대한 문제를 연구한 사람이면 일곱 우뢰가 무엇을 가리킨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시내산에서 우뢰소리가 발표할 때에도 모세는 그 음성을 분별하여 바로 들었으나 백성들은 우뢰와 번개와 큰 진동하는 소리로 들었기 때문에(출19:16∼19, 20:18∼19) 백성들이 두려워 모세에게 이 우뢰소리를 더 듣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계시록 10장 4절에 기록된 일곱 우뢰도 일반에게는 바로 듣지 못하게 되었으나 요한은 모세가 들은 완전한 언약의 말씀을 바로 들은 것이다.

느부갓네살 왕의 꿈
그러나 이 일곱 우뢰를 봉하게 된 것은 마치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고 그 꿈을 잊어버림과 같은 것이다.
만일 이 꿈을 알아내고 해몽하는 자가 없으면 바벨론에 모든 박사와 다니엘과 그의 동료 세 사람까지도 다 죽음을 당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와 같이 이 일곱 우뢰도 교회의 운명이 달린 중요한 진리가 들어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석하지 않으면 바벨론의 모든 박사들 곧, 바알신 숭배자들은 물론이거니와 하나님의 백성들까지도 다 영혼의 멸망을 받게 될 것인 바 이는 느부갓네살 왕의 꿈이 세상 마지막 운명을 결정한 것 같이 일곱 우뢰도 마지막 교회의 운명을 결정한 중대한 문제가 되므로 왕의 꿈도 잊어 버리게 하신 동시에 일곱 우뢰도 봉하게 하신 것이다.(단2:1∼6, 계10:4)
만일에 그 꿈을 잊어 버리지 않았더라면 다니엘이 해몽할 여지없이 바벨론 박사들이 거짓으로 다 해몽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왕의 꿈을 잊어 버리게 하사 다니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사 그 꿈을 알아내는 사람이라야 해몽이 분명하다는 것을 왕으로 인정하게 하신 것과 같이(단2:9) 일곱 우뢰도 봉하게 된 것은 개봉하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속에 깊은 진리를 해석할 때 깨닫는 사람들로 하여금 확실하게 믿게 하시려고 봉하게 하신 것이다.
만일에 이 일곱 우뢰를 봉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모든 거짓 교사들이 거짓 해석으로 하나님의 뜻을 그릇되게 만들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고로 이 일곱 우뢰가 마지막 교회의 운명이 달린 진리가 되기 때문에 봉하게 된것이다.
그러나 봉했다고 해서 원칙의 뜻과 의미를 다 봉한 것은 아니다.
일곱 우뢰를 봉하라고 하신 것은 다니엘의 묵시와 같이 정하신 기한 안에는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봉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하나님의 뜻은 일곱 우뢰라고 하신 중에 다 표시되어 있다.
다니엘의 묵시도 봉하여 두라고 해서 묵시의 내용까지 다 봉한 것은 아니다.
묵시의 내용은 다 기록되어 있으나 정한 기한 안에는 깨달을 사람이 없기 때문에 봉한 것으로 되어 있다.(단8:26, 12:4, 9)
이사야 선지자도「율법을 인봉(印封)하여 두라」하셨으니 율법이라면 누구나 다 잘아는 사실인데 율법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인봉하여 두라 하신 것은 율법 자체를 봉한 것이 아니라고 율법의 중요한 문제가 정한 기한 안에는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봉하라는 것으로 되어 있다.(사8:16)
이와 같이 일곱 우뢰도 정하신 기한 안에는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봉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일곱 우뢰라고 하신 말씀이 의미가 없거나 뜻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일곱 우뢰만 기록하였을찌라도 정한 기한이 돌아오면 일곱 우뢰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기 때문에 다만 일곱 우뢰라고만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계22:10, 단12:9∼10)
그런고로 오늘날 교회의 운명이 위급한 시기에 놓여 있는 이 때 우리들은 이 문제를 깊이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일곱 우뢰와 율법
이 일곱 우뢰에 대한 연구 재료는 옛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예언하신 말씀 중에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기록한 바「너는 이 증거의 말씀을 싸매고 율법을 인봉(印封)하여 나의 제자 중에 맡기라」(사8:16) 하셨다.
성경 말씀 중에는 짝이 없는 기록이 없다.
기록한 바「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찾아 읽어보라 이것들 중에 하나도 빠짐이 없고 그 짝이 없는 것이 없나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명하시고 그 신이 모으심이라」(사34:16) 하시었다.
그런고로 계시록 10장 4절에는「일곱 우뢰가 발한 것을 기록하지 말고 인봉하여 두라」하시었으며 이사야 8장 16절에는「너는 이 증거의 말씀을 싸매고 율법을 인봉하여 나의 제자 중에 맡기라」(구역성경 사8:16 참고) 하시었다.
율법도 인봉하라고 하신 동시에 일곱 우뢰도 인봉하라고 하사 짝을 맞추어 연구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면 이사야 8장 16절에 인봉한 율법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사야는 인봉하라는 율법에 대해서도 결론적으로 기록하였으니「우리의 절기 지키는 시온성을 보라 너희 눈이 예루살렘은 안정한 처소됨을 보리니 옮기지 못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원히 빠지지 아니하며 그 줄이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할찌라 여호와께서는 거기서 위엄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사33:20∼30) 하였다.
그런고로 시내산에서 완전한 우뢰로 발표하신 율법과 이사야 8장 16절의 인봉하라는 율법과 일곱 우뢰를 봉하라는 문제들을 연결해서 연구하게 되면 확실한 사실이 들어나는 것이다.
혹은 말하기를 이사야 8장 16절에 기록한 율법은 십계명만 가리킨 줄 안다.
그러나 율법이자 계명이요 하나님께 속한 계명이자 절기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사야 8장 16절을 기록한 이사야는 이사야 33장 20절도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율법 중에 오늘날까지 나타나지 않고 봉한 대로 있는 것은 삼차의 칠개 절기 밖에 없다.
인봉한 일곱 우뢰의 비밀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마지막으로 반복될 것이다.
기록한 바「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총회)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4:1∼6 참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선지자가 마지막 주의 재림하실 때에 나타낼 예언도 다 절기를 말한 것이다.(참고 겔36:26, 37:24, 습3:18, 렘8:7, 겔11:20)
삼차의 칠개 절기는 일곱 우뢰가 개봉(開封)이 되기 전에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그 속에 오묘한 진리는 더욱 분별치 못할 것이다.
오늘날 혹 절기에 대한 문제를 안다 할찌라도 부분적으로만 알았을 것이다.
오늘날까지 이 진리가 봉하게 된 것은 성경을 이루시려고 하신 것이다.
때가 되면「하나님의 오묘함이 반드시 이루리니 이는 그 종 여러 선지자에게 보이신 복음과 같은 것이다」(계10:7)
일곱 우뢰가 지금까지 성경 속에 감추어져 있었으므로 비밀이라고 할 수 있으나, 실상은 전에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다지키고 행하던 것인데 교회가 사탄에게 밟힘을 당함으로부터 하나님의 참된 진리가 성경속에 감추어져 때가 차기까지 봉하여 두신 것이다.(계10:4, 사8:16)
이 삼차의 일곱가지 절기는 다 모세 율법의 정한 절기라고 할 수 있으나 실상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신 새 언약의 날들과 연결된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찌라도 절기와 안식일이 아니면 알지 못하는 순간에 다른 신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기록한 바「여호와의 거룩히 구별하신 절기에」(스3:5, 사30:29)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인지 사단을 섬기는 일인지 구별할 수 있는 문제는 그 모든 절기로서만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대하13:9)
그런고로 일곱 우뢰는 삼차의 칠개 절기를 가리키는 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칠개 절기
(1) 유월절 성만찬
(2) 무교절 금식기도
(3) 초실절의 실상인 부활절 기념
(4) 오순절 기도와 부흥회
(5) 취각절 기도
(6) 대속죄일 죄사함의 특별기도
(7) 장막절 전도대회
이 일곱가지 절기가 완전히 밝혀져야 할 것이다.
그런고로 일곱 우뢰의 비밀인 삼차의 칠개 절기 속에는 하늘 성전에 관한 문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장래 있을 교회문제까지 깨달을 수 있는 진리가 무궁무진한 것이다.
혹은 말하기를 일곱 우뢰는 봉하였으니 우리의 알 바가 아니라고 한다.
이와 같은 말은 이사야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신 것이다.
기록한바「모든 묵시는 너희에게 봉한 책의 말과 같으니 혹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말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사29:11) 하였다.
성경상 지식이 가장 유식하다는 교회가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하는 것은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시키지 않는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결론에 가서 하신 말씀에「저희가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가르친 계명뿐이라.」(사29:13)고 책망하신 것이다.
그런고로 하나님께 속한 계명의 원칙을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첫번째되는 계명을 지켰더라면 (왕하23:21∼25, 마22:36∼38 비교) 일곱 우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고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추측적으로 생각하기를 일곱 우뢰는 재림에 관계되는 문제라고 하여 그 문제를 깊이 연구하지 않는 것은 옛날 바리새 교인들과 같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성 예루살렘에서 탄생하실 것과 엘리야가 먼저 와야 그리스도가 오리라 하고 추측적 생각만 가지고 엘리야와 메시야에 관한 문제를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들의 생각과 맞지 않음으로 침례 요한을 배척하는 동시에 그리스도를 배척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갈릴리에서 날 수 없고 또는 엘리야가 와야 그리스도가 오실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갈릴리 사람이라고 배척하였으며 엘리야도 오지 않았는데 어찌 그리스도가 오실 수 있느냐고 비방하였던 것이다. (참고 요7:49∼52, 막9:11∼13)
그러나 그들이 메시야에 대한 문제를 깊이 연구 하였더라면 그리스도를 갈릴리 사람이라고 배척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사야 선지자가 갈릴리에 대해서 예언하였기 때문이다.
기록한 바「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신지라 흑암중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9:1∼3) 하시었다.
이와 같이 일곱 우뢰도 깊이 연구하였더라면 주의 재림에 대한 기별이 어디서 발견 될 것을 가히 짐작할 것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