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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설교 Sermons

과연 육체는 악한가? 2016.7.20. 수요일예배

작성자헤세드|작성시간16.07.20|조회수40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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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과연 악한가?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6:15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로마서 8:23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로새서 3:5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찌니라 갈라디아서 5:17-26


오래도록, 지금까지도 믿는 사람들은 바로 이 구절을 두고 자신의 육체 안에 성품에 해당하는 면에서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해 오고 있습니다. 그 골자는 17절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이 둘은 서로 거스리며 하나를 취하면 다른 하나를 얻지 못하는 상황 속에 끊임없이 싸우며 이기고 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 따른 정죄도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이 구절은 주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에 대해 하진 말씀과도 유사합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태복음 5:21-22 주님의 말씀처럼 바울의 글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은 이제 신약시대의 믿는 자들의 싸움은 성품 속에서 역사하는 악과의 싸움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마음 속의 미움과 시기, 질투, 탐욕 등을 몰아내고 오직 성령의 소욕대로 살려고 부단히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소욕은 갈라디아서에 언급한대로 사랑과 희락, 화평, 온유, 절제, 자비, 양선, 온유, 절제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것도 역시 성품에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따라서 구약시대처럼 행동에 관한 죄만 해결하면 되었던 데 비해 신약에 와서는 더 깊은 데서 나오는 문제를 두고 싸워야 하는 만큼 더 어려워진 면이 있습니다. 게다가 이 싸움은 해 보면 알겠지만 온전히 지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즉 인격, 즉 성품의 구조 중에 많은 부분이 감정에 관계되어 있는데 우리가 하는 싸움은 주로 의지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지는 감정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중독자들이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중독에 이르는 과정이 감정을 좇고 의지를 묵살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의지로 감정을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위에 언급한 성품들을 성령의 열매라고 표현한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7절의 내용만으로 보면 마치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라는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되어 있어서 이 작업이 마치 선택, 즉 의지의 문제인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라는 표현은 이 문제가 의지적 선택의 문제보다 훨씬 더 깊은 원인에 의해 나타나게 되는 결과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이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은 지금까지 사용하던 방식이 아닌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식의 방식입니다. 이제 육체의 소욕을 대하는 방식을 생각해 봅시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위의 표현은 마치 구약의 행위적인 항목을 나열한 듯 보입니다. 하지만 육체의 일은 비단 여기에 열거된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뒷 부분, “그와 같은 것들이라는 내용이 곧 열거하기 어려운 많은 일들이 여기 포함됨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의 접근은 먼저 모든 하나님의 창조물은 다 선하게 지어졌다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악해지는 것은 본래의 자리를 떠나 역행하고 지나쳐진데서 기인합니다. 이것은 보이는 사물 뿐아니라 보이지 않는 인격의 성품과 기능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인간의 몸의 모든 기관과 기능은 다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때로 흔적기관이라던가 하는 표현은 아직 그 기능을 알아내지 못했을 때 무신론자들이 하는 표현이었습니다. 후에 기술의 발달로 그 기능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는 오해가 육체의 소욕이라는 말과 육체의 욕구라는 말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데서 생겨납니다. 육체는 욕구가 있습니다. 식욕, 성욕, 편한함에 대한 욕구, 수면욕, 등등 입니다. 이러한 욕구들은 몸에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일종의 신호입니다. 즉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이 충족되면 이제 포만감을 갖게 됩니다. 그것을 적당하다.’고 합니다. 이 적당한 정도는 몸을 지으신 하나님이 주신 당연한 요구사항이고 이것을 잘 유지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할 일입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몸에서 나오는 요구와 소리를 듣지 않는다면 주신 귀한 몸을 잘 간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몸의 모든 기능은 더 요구하는 것과 이제 되었다고 하는 양방향의 신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든지 이 조절 기능이 손상되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게 됩니다. 즉 이미 배가 부른데도 포만조절기능이 손상되면 아직 배가 고픈 것처럼 느껴져서 계속 먹게 되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조절 기능이 손상되는 것이 단순히 외상에 의해 일어나는 경우보다 더 근본된 다른 이유가 작용하여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이어트에 대한 심각한 스트레스가 거식증을 일으키고 부모를 잃은 슬픔이 폭식증을 일으키게 하기도 합니다. 인간이 적당하게 조절할 수 있는 기능을 상실하고 지나쳐진 상태가 바로 위에 바울이 언급한 육체의 소욕의 상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니 나타난 증상만 보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듯이 하는 것은 증상치료일 수는 있지만 근본치료는 되지 못합니다. 마치 폭식증 걸린 사람의 조절기능은 그대로 둔 채 음식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일단은 급한대로 그것도 필요하겠으나 우리는 이제 그 근본된 부분에 대한 접근을 해야 할 때입니다.


육체를 좇는 것이 지나쳐 악해지는 것은 거기에 행복이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을 더 가지려 하고 남에게 있는 것조차 빼앗으려 하는 것은 더 가져야 더 행복하다고 믿기 때문이고 그것은 그렇게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소욕을 꺽는 것은 그것을 직접 대항하여 싸워서 욕심이 없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문자적 학습으로 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상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것은 영혼의 소생입니다. 그래서 오직 육체의 소욕에서 벗어나는 것이 부활하신 주님과의 연합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하는 복음의 회복은 우리의 인식과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주와의 연합으로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히신 후에 주와 연합한 영혼은 온 인격의 각 부분을 회복합니다. 물론 거기에는 육체까지 포함됩니다. 우리가 하는 회복의 역사는 육체의 욕구를 묵살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대로 적당히 조절하는 기능을 회복하는 것, 즉 제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어떤 육체의 욕구도 처음부터 악하게 지어진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다 제자리로 돌아갈 때 참으로 적절한 정도를 유지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육체가 있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함을 얼마라도 더 느낄 수 있고 이것은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정이 더 이상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창조의 풍성함을 감사하는 가장 적극적이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회복의 역사로 인격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소욕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회복된 성품을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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