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받기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고린도후서 11:13-15
형상대로 만드신 아담을 에덴에 두시고 지으신 창조물들에 이름을 짓게 하셨을 때, 땅을 경작하게 하셨을 때, 지어진 방주를 홍수로 물 위에 띄우셨을 때, 아라랏 산에 머무르게 하시고 새 시대를 맞게 하셨을 때,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10대를 지나 보아스 때에 가나안을 실제 살고 누리게 하셨을 때, 아담도 경작하였고 노아도 경작하였으며 보아스도 역시 경작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그로부터 다시 10대를 지나 웃시야가 왕이 되었을 때 그도 농사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경작은 자신의 노력만으로 나무를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의 생명이 스스로 자라나는 것을 터득하여 그 생명의 운동을 따라 돕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무에게 하나님이 주신 창조의 원리와 생명의 능력이 움직인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근본으로 합니다. 사람은 나무입니다. 죽은 나무는 자라지 않지만 죽은 영혼은 소멸되지 않으면서 죽음의 기운을 겉 사람에게 끼치면서 인격의 껍데기를 자아로 알고 살게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죽은 나무라기보다는 가시와 엉겅퀴로 표현하신 것이 더 적합할 것입니다.
산 나무는 주와 연합하여 영혼이 살아난 심령입니다. 그러나 살아난 영혼이 주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인격의 각 부분을 회복하고 조화를 이루게 하는 역사를 하려고 할 때 기존에 있던 인격들과 부딪히는 상황들을 맞게 됩니다. 회복은 실로 인격의 모든 부분에서 진행됩니다. 이제 모든 것은 본래와 같이 제 자리를 찾고 본래의 기능을 회복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시고 그에게 주신 역할은 이름을 짓는 것과 경작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흔히 다스리고 지키라는 말씀에 더 주목하고 그것을 하지 않아 뱀의 유혹을 받게 되었다고 하지만 번역과정에서 다스리라는 표현이 사용되었고 그 이유로 마치 교회의 직분이 사람을 지배하고 명령하는 것처럼 인식되었지만 실제로 하신 표현은 “경작하고 돌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름을 짓는 데 무엇이 필요할까요? 경작하는 데는 또 무엇이 필요할까요? 이것이 육으로 하는 작업이라면 이름을 짓기 위해서는 지식이, 경작하는 데는 손과 발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이 사명을 감당하는 데는 두 작업 모두 눈이 필요합니다. 이름을 짓기 위해서도 눈, 즉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이 필요하고 경작하는 것 역시 나의 수고로 결실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 스스로 가진 생명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 움직임을 따라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두 가지 사명이 모두 다른 대상, 즉 하나님의 창조물들과 에덴동산에 대한 것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회복의 과정에 있습니다. 충만함은 그 회복의 과정이 다 진행되어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고 제 기능을 회복하게 되었을 때 갖게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왜 이 충만함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인가 하면 충만함은 서로의 다양함이 조화를 이루고 일치가 되었을 때 이루어지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우리 안에서 충만함을 느끼는 것은 회복된 기능으로 홀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 우리로서 기능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회복된 기능은 죽은 심령을 살려주심과 상한 심령을 회복하게 하시고 구부러진 관계를 곧게 하여 올바른 우리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때로 지나쳐 악하게 된 인격이 그 단단해지고 날카로워진 부분을 본래의 자신으로 생각하는 경우, 하나님의 손길이 혹 사람을 통하여 그 지나침을 수술하려 할 때 마치 자신이 공격당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자신을 선한 사람, 착한 사람으로 포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에 대하여 무기력하게 방어하지도 못하는 무지한 상태로 되기도 합니다. 여하한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택하심이 있으면, 그에게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하심을 발견한다면 그 안에 주께서 연합하시고 그 영혼을 소성케 하심을 믿을 수 있는 마음이 바로 눈입니다.
그것은 먼저 자신에게서 발견되어집니다. 자신의 참된 자아와 거짓된 자아를 분별할 수 있게 되고 거짓된 자아의 소리를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는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회복된 인격의 기능을 따라 말을 하고 손을 내밀고 귀로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참된 만남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경작하는 일입니다. 아담이 지어지기까지, 노아가 방주를 짓는 동안,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광야를 다 지나도록 경작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경작은 결국 약속의 성취요, 창조의 완성이요, 새로운 시대를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