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받기
회복의 과정에서 ‘나’를 경험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나’와 연합하시고 ‘나’의 상한 심령을 회복시키시고 ‘나’를 이해하게 하시고 ‘나’로 ‘나’되게 하시는 과정에 있습니다. 점점, 그리고 더 이상 나로 있음이 외로움이 아니고 부끄러움도 아닌 상태로 나아가게 됩니다. 어쩌면 이것은 에덴의 아담이 느낀 수치, 혹은 두려움의 해소라는 의미로서의 근본적 회복을 경험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자신이 가진 부족이나 힘든 과거가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되고 자신의 삶과 구원의 이치가 이해되어지는 형태로 느껴질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새삼 주목하게 되는 또 하나의 존재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임입니다. ‘교회’라는 표현이 주는 워낙에 다양한 의미로 해서 차라리 모임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보고자 합니다. 거기에는 각각의 회복되어 가는 ‘나’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임은 단순히 ‘나’들의 모여있는 의미보다는 더 살아 움직이는 또 하나의 주체, 혹은 존재와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거기에 있는 ‘나’는 각각 다 다르고 입장과 성격도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그 모임에 일부가 되어 있고 그러나 나는 이미 나로서 충만해 있다는 느낌이면서 동시에 그 모임도 결코 나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개인이 회복되어 감과 함께 이 모임이라는 존재도 역시 회복의 과정을 겪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는 여러 어려운 형편 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마음으로 모임이 지켜지기를 바라며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있던 때가 있었고 그 때는 모임이 마치 단단한 껍질로 싸여 있는 듯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후엔 모임이 마음이 편해지고 거기서 쉰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주는 의미 중에 안식의 역할이 회복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 오면서 이제 무언지 모자라고 누군가가 더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있다가 마치 세포분열을 하듯이 새로운 가정들이 들어 오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시기에 새로운 식구들을 맞으며 대화하며 그 이야기들을 들으며 이제는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직 이 모임이 서로 생각이 늘 동일하지도 않고 대화가 늘 신령하지도 않지만 세상에서 말하는 세력이 형성되지도 않고 누군가가 주도해서 끌고가게 하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혹은 위로로, 혹은 경계로, ‘함께’의 역할을 해 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물론 그 모든 과정과 현재에는 각자와 연합하시고 모임에 임재하시는 주님이 계심을 압니다. 그럼 이제 이 모임은 어떤 과정을 겪고 가게 될까요? 회복된 ‘나’들이 회복되어 가는 과정을 통하여 ‘모임’이라는 또 한 존재도 역시 회복되고 본연의 기능들을 회복해 가고 있는 중이니 이제 이 모임의 본래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나’의 차원이 아닌 ‘우리’의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기가 되지 않았나 하는 마음입니다.
문제는 형태가 아니라 역할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은 영혼의 소생과 상한 심령의 회복입니다. 이 모두는 주님의 은혜로만 되어집니다. 주와의 연합으로 영혼이 소생한 사실을 복음으로 알려주고 실질적으로 모임에서 만남으로 심령의 회복을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주께서 친히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동일한 것을 바라고 우리의 존재와 모임과 역할이 그것을 함께 성취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아직 내 상태가 그것을 바라기에는 너무 아픔이 남아 있다싶으면 하라 하지 말라를 떠나서 할 수 없겠습니다. 다리가 아프면 쉬어야 하겠지만 다리가 아프다고 해도 교사는 여전히 가르치기를 계속하듯이 우리의 어느 부분은 아직 아프더라도 우리가 개인이 아니라 우리로서 함께 하는 모임의 상태는 이러한 회복의 역사를 수행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3:9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출애굽기 3:4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창세기 4:9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20
위의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혹은 주님께서 누군가를 찾으시거나 부르시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 아담이 어디 있는지, 아벨이 어떻게 죽임을 당했는지 모르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마치 제한 있는 사람처럼 그 장면에 보이지 않으면 찾으시는 것처럼 된 표현은 무슨 의미겠습니까? 하나님은 무례히 행치 않으시고 또 동시에 역사를 하시기에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은 사람입장에서는 무언가를 찾는 심정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이는 어쩌면 하나님의 부르심이 인격의 내면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임에 주님은 무어라 우리를 부르시고 찾으실까요? 주께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실지를 궁금해 하지 말고 이미 우리에게 알려주신 주님의 부르심의 의미를 생각해 볼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신부로 부르시고 우리와 함께 주님의 자녀를 낳으시려 하십니다. 그 자녀는 주님의 자녀요, 또 모임된 우리의 자녀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