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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미학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베드로후서 3:8-10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서정윤 시인의 홀로서기라는 시의 첫구절입니다. 인생은 짦은 몇 번의 만남과 아주 오랜 기다림으로 이루어진 듯합니다. 그래서 그 만남이 그보다 훨씬 더 오랜 기다림을 보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오늘도 무언지도 모르는 것들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이라는 말이 이렇게 숨이 턱까지 차오르게 하는데 성경은 우리에게 인내의 유용성을 말하고 있으니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어린아이를 위에서 눌러 주저앉히는 것같은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믿음에 있어서 기다림, 즉 인내의 미덕을 잘 보여주신 분이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약속을 믿고 그랬기에 그 약속을 성취해 드려야 할 것으로 여겨서 최선을 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성취는 그의 수고와 인내를 통하여 성취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모든 수고와 인내가 다 소진된 후, 오직 하나님의 때와 능력에 의해 성취된 것을 아브라함이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진행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어쩌면 더 많은 세월, 기다림의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하여 이삭은 모든 삶의 과정이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처럼 그렇게 많이 기다리지 않았고 그처럼 많이 인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주어지는 삶에서 살아갔을 뿐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도 이삭의 제사 이후에는 그 이전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려야 한다는 조바심과 거기서 나온 열심도 보이지 않았고 이삭과 함께 주어진 삶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본문에는 인내를 언급합니다. 그러나 인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의 날이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지 않다고 하십니다. 어떤 이는 더디다고 생각하고 어떤 이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기다리라고 하지도 않고 인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도 아닙니다. 다음 구절을 보면 그 이해의 실마리가 보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이는 단지 긴시간과 짧은 시간을 대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를 해석하기를 하나님께서 인생을 사랑하시니 천년이 하루같고 인생이 더디 이루어지니 하루가 천년같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천년은 인과론의 시간세계에서 가장 긴 시간을 의미합니다. 즉 시간의 표현으로 나타낸 영생을 의미합니다. 그에 대비하여 하루는 시간 단위의 가장 작은 것이며 동시에 현재성을 나타냅니다. 즉 우리의 오늘이라는 하루를 인식하기를 시간의 흐름 속에서 파악하려 하지 말고 영생의 의미로서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보이는 세상은 시간의 흐름 속에 흘러가고 변화되지만 거기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함께 운행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실상 시간의 흐름과 무관한 세계인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시간의 빨리 가고 더디감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약속의 성취가 더디게 이루어진다는 의미 자체가 없습니다. 즉 우리가 무엇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은 보여지는 것으로 모든 것을 삼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모든 것을 파악하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생겨지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더러 기다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단지 인과론적 세상에 있는 우리가 그렇게 느낄 따름입니다. 영원의 세계, 실상의 세계에서는 인내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주의 약속의 성취는 시간이 가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인식, 영혼의 세계에 대한 느낌입니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도적이 오듯 한다는 것은 예상치 못한 시간에 대한 것만이 아니고 그 방식 역시 우리가 예상하는 것과 같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랜 시간이 지나가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의 인식의 방법이 달라져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