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받기
세월이 깡패다.
무병장수를 말하고 의학기술의 발전을 논하더라도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어느 연령대 이상에서는 참으로 마음을 초라하고 서럽게 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하고 음악을 하고 운동을 하여 젊은 티를 내려고 해도 배고픈 아이에게 노래를 불러준들 참된 위로가 되지 못하고 먹다남은 식은 밥이라도 한 술 입에 넣어 주는 것이 차라리 낫듯이 한 번 먹은 세월은 뱉어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하기를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사야 40:1 하십니다. 이사야가 이 예언을 기록할 당시 성군 웃시야 왕은 죽고 다윗 왕조는 쇠퇴의 길을 걷다가 결국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유력한 온 유대인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거나 혹은 애굽으로 가고 나머지 민초들만 남아서 가나안 땅을 지키게 됩니다.
그들에게 과연 하나님의 위로는 어디 있으며 그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때로는 성경이 우리를 화나게도 합니다. 이렇게 말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4 논리적으로는 전혀 이해될 수 없는 표현입니다. 정서적 공감을 할 수도 없습니다. 대체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는 무엇일까요?
위로와 관련된 한 성경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예레미야 31:15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이 말씀은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난다는 서기관들의 말을 들은 헤롯왕에 의해 두살 이하 사내아이들이 모두 도륙당하고 난 후에 마태에 의해서 인용됩니다.
마태복음 2: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라마, 셀사, 베들레헴(에브랏) 가는 길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창세기 35:18-20
예레미야는 의도적으로 라헬의 상실감과 당시 이스라엘의 상실감(물론 거기에는 라헬이 죽을 때 낳은 베냐민 지파도 포함되고 있습니다.)을 연결짓고 있습니다. 이 모든 상황, 즉 베들레헴의 아이들이 죽고, 예레미야 시절 이스라엘이 다 멸망당하고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가 결국 숨을 거두는 이 모든 상황이 베들레헴과 라마를 중심으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입니다. 라헬이 아이를 낳겠다는 욕구가 당시에 개인적으로는 언니와의 경쟁에서 지기 싫어하는 여인의 투기로 나타나고 있지만 실상 그들의 생산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과정이라는 측면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오늘의 우리의 상황에 비추어 본다면 얼마든지 영적인 열망으로 이해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라헬의 상실감은 아브라함이나 이삭의 상실감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심정을 예레미야 당시에 이스라엘의 멸망을 두고 백성들이 느끼는 상실감과 연결시키는 것은 결코 무리한 설정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이요, 언약의 증표인데 그 민족이 이방세력에 멸망을 당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상실과도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이 상황이 주님의 탄생을 두고 또 다시 발생합니다. 헤롯이 주변의 모든 아이를 다 죽임으로서 메시야의 탄생을 막으려는 것은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고자 함이었지만 이것은 결국 온 성경 역사를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의 섭리를 막으려는 현실적인 방해공작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위로를 말하는 것은 우리에게 닥치는 실망과 좌절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체가 쇠하여 감을 느끼고 소유와 관계가 손상되어질 때 우리는 실망하고 좌절합니다. 단지 현실적 이유에서 느끼는 감정이지만 실상 하나님의 섭리도 역시 흙으로 된 인생의 삶과 인격과 육체를 통해 성취하신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만일 우리의 육체가 없으면, 우리 삶이 지속될 수 없다면 하나님의 뜻도 역시 성취되지 못한 것처럼 보여집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이러합니다. 모든 성경의 역사가 증거하고 성경이 오늘까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주신 사실도 역시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약속은 결코 멈춰지지 않고 결국 그 뜻을 이루시기에 충분하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실한 소중한 것은 소멸될 것들, 점점 소실되어 갈 것들입니다. 그것이 강건함으로 하나님의 연합이 성취되는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받을 심령은 받으시오.) 눈에 보여지는 그것들은 영생의 실상은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원에 속한 것을 결코 놓지 않으시고 결국 그 성취를 보십니다. 또한 믿는 우리도 이것이 성취될 것을 아는 것은 그것이 이미 하나님 안에 성취되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