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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설교 Sermons

벌거벗은 노아의 복권 2016.9.14. 수요일예배

작성자헤세드|작성시간16.09.14|조회수44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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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노아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창세기 9:20-27


노아의 방주준비와 홍수, 그리고 아라랏 산에 정착하여 새로운 세상을 맞은 사건들은 수평적 사건들의 흐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연합과 동행이 그들을 남은 자가 되게 하였고 그 과정에서 저들은 하나님의 풍성함과 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물이 흘러갈 때 제자리에 서 있던 사람은 수많은 물결이 지나가는 것을 느끼지만 자신을 그 자리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아무 이동도 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많은 것을 겪을 수 있습니다.


율법적 시각으로 노아의 술취함과 벗음을 노인의 방만함으로 해석하여 결국 노아도 말년에 총기를 잃고 방종에 빠졌다고 설교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방주의 준비와 새로운 세상을 맞은 상황은 그저 하나의 과업을 성취한 정도로 보는 것이 아니라 방주라는 하나님과의 동행의 세계에 있었다고 하는 해석이 일반적임을 생각해 보면 이 벗음은 에덴에서의 벗음과도 같은 차원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즉 의복을 입지 않음이 아니라 소유로 자신을 가려야 하는 이유가 없어진, 즉 하나님과의 연합과 동행이 전부가 된 상태의 다른 묘사로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노아의 술취함과 벌거벗음을 방종의 무질서함이 아닌 새로운 세계에서의 정죄함 없는 상태라고 본다면 함의 행동도 그 의미를 달리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선 이 하체라는 번역은 터무니 없는 해석을 불러 있으킵니다. 마치 신체의 어떤 특정부분을 보면 안된다는 식으로, 그리고 그 부분이 타락에 연관되어 있다는 식의 해석이 가능케 합니다만 본래는 그저 벗은 몸, 즉 나체를 의미할 뿐입니다. 즉 특정부분이 아닌 벗었음을 형제들에게 고한 것입니다. 이는 노아의 벗음이 자식들에게는 가려야 할 나체로 여겨졌다는 것입니다.


함의 행동은 아비의 하체를 보고 형제들에게 고하였고 셈과 야벳은 겉옷을 등에 덮고 뒷걸음질 쳐서 하체를 보지 않았다고 하지만 셈과 야벳 역시 아비의 벗었음은 부끄러운 일로 간주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누구의 말이 축복이 되고 혹은 저주가 됨을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하지만 실상 저주를 받는 사람은 스스로가 그런 길에 있고 축복도 그런 자리에 있어서 받게 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가 술취했다가 깨어나서는 둘째 아들을 저주했다고 볼 것이 아니라 이들을 통하여 세상 민족이 나뉘고 바벨 사건 이후에 언어의 혼잡이 일어난 상황, 즉 문화세계의 분리라는 관점에서 이 사건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창세기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들어가기 직전에 모세가 기록한 것으로서 장차 마주칠 가나안인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노아의 저주를 들어 그들은 이미 멸망될 족속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노아가 가나안을 언급할 때 아직 가나안은 함에게서 나지도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잘못을 한 것은 함인데 아직 나지도 않은 가나안이 저주를 받고 있습니다. 즉 이는 기록자의 의도가 담겨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천년을 이 구절을 근거로 흑인들이 저주받은 족속 함의 자손이라고 여겨서 노예로 사고 파는 것을 신학적으로 지지해 왔습니다. 이는 명백한 오류입니다. 저주를 받은 것은 가나안이었고 그들에게서는 흑인들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단지 함에서 구스로, 또 니므롯으로 이어지는 줄기와 바벨탑 사건과 언어의 혼잡은 문화의 분리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부분입니다. 언어가 달라지는 데에는 셈의 자손과 야벳의 자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 곤란함은 각 족속이 모두 다 겪게 되었습니다. 누구는 축복이고 누구는 저주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언어는 정신과 문화를 상징합니다. 이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음만의 의미가 아니라 하늘의 말과 땅의 말이 나뉘고 정신과 문화와 삶이 나뉘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섭리 중에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 물로 나뉘게 하신 창조의 둘째 날의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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