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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두 얼굴-이승만 전 대통령과 보도 연맹 대학살 사건

작성자필레오|작성시간22.03.03|조회수629 목록 댓글 68

이승만 박사의 두 얼굴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사건에 관한 글)

이승만 전 대통령과 보도 연맹 대학살 사건

 

아래의 글은 서론, 본론, 결론 형식의 소논문으로 기록한 글이 아니다.

카페의 회원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두서없이 적은 글이다.

국민 중에 잘 모르고 있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이승만 박사의 악한 행위들  

   두 얼굴을 가진 이승만 박사를 바르게 알려면 당연히 이승만 박사가 25년 동안 살았던 하와이의 대한인국민회가 기록으로 남겨 놓은 "재미한인 50년사"의 기록을 읽지 않고는 자세하게 알 수 없다. 이 기록 외에 다른 기록들은 수박곁핡기식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재미한인 50년사' 122쪽에, "리승만이 하와이에 오던 때까지도 국민회의 기상이 장쾌하고 동포의 염치와 양심이 아름다워 안으로 단체의 화기가 있고 밖으로 사람들의 칭송이 있더니"라고 하였다. 이 문헌을 보면 이승만 박사의 이중성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된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었다. 

    '재미한인 50년사' 111쪽에 " 1915년 5월에 리승만이 국민회 풍파를 일으키고 그 파동의 기세를 이용하여 국민회를 장악한 이후에 파쟁이 계속되고 도덕상 신용이 타락하여 특별 경찰권을 상실하였다."라고 하였다.

   '재미한인 50년사' 111쪽 하단에 "1913년 1월부터 국민회가 하와이 각 섬에 한인이 거류하는 구역마다 국민회 경찰 부장을 두고 경찰 행정을자치하였으며 1915년 5월에 리승만이 국민회 풍파를 일으키고 그 파동의 기세를 이용하여 국민회를 장악한 이후에 파쟁이 계속되고 도덕상 신용이 타락하여 특별 경찰권을 상실하였다."라고 하였다.

   '재미한인 50년사' 115쪽에 "이 성명서가 발표되니 '국민보'는 리승만의 조리 없는 이론과 불법 행동을 공박하고"라고 하였다. '재미한인 50년사' 115쪽에 "리승만이 국민회를 장악한 후에 사회의 법규를 파괴하는데...."라고 하였다. 122쪽에는 "국민회 소유의 기지까지 욕심을 냈다."라고 하였다. 

  '재미한인 50년사' 116쪽 상단에 "리승만의 성명서가 국민회 당국을 비난하고 인심을 선동하여 국민회를 전복하려는 의사인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나 그러나 그 때에 동포가 실정을 관찰하지 못하고 다만 리승만이 독립협회 당시에 유명한 사람으로 국가를 위하여 7년 징역하였다는 것과 철학박사를 하였다는 간판에 인심이 쏠리는데 더욱이 각 지방 교회의 목사와 전도사와 국어학교 선생 중의 리승만 추종자가 많아서 충동하던 까닭에 사회 풍파를 피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각 지방에 인심이 갈기고 파쟁이 심하여 국민회가 분열 상태에 이르니 오하우 섬의 4처 지방회가 연서하여 총회에 청원하되 특별 대의회를 소집하여 시미 문제를 조정하라고 하였으며 그 청원서가 아래와 같다."라고 하였다

  '재미한인 50년사' 158쪽에 이것이 1915년 이래 리승만이 하와이에서 당파 싸움을 계속한 수단이고 자신이 있어서 시작한 것이나 이번 싸움에는 일마다 실패하고 단체의 재력을 고갈시킨 후에 하와이에 있을 면목이 없게 되어서 하와이를 떠나는데 구라파 외교운동을 구실 삼아 제네바와 비엔나 등지를 유람하였다."라고 하였다.

  리승만을 한인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피땀 흘러서 모은 독립자금과 재산 등을 고갈시킨 후에 자신은 젊은 여자를 데리고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면서 최고급 호텔 등에서 묵으면서 호의호식하면서 유람 생활했다. 

    '재미한인 50년사' 159쪽에, 총재 리승만은 임기가 없는 평생직으로 추대되었고 헌장 이상의 결제권을 가진 까닭에 회중의 결의안이라도 총재의 허락없이는 실행하지 못하였으며 어느 때나 중요한 사건은 총재의 선포문이나 말로써 진행되었다."라고 하였다.

  이승만(리승만)의 독재는 하와이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재미한인 50년사'의 기록에 따르면, 이승만 박사가 가는 곳마다 불법, 분열, 분쟁, 풍파, 선동, 장악, 욕심 등 다양한 악한 수식어가 단골로 따라 붙었다. 이승만은 국민회의 재산과 독립자금 등을 노리고 장악했다. '재미한인 50년사'를 자세하게 읽어 보면, 이승만 박사의 실체를 바르게 알 수 있다. 이승만에 관한 이 기록 외에 다른 기록은 신뢰하기 어렵다. 이승만과 함께 활동하고 그 옆에서 직접 오랫 동안 지켜 본 국민회(독립운동 기구) 소속의 일원들이 그 누구 보다 당연히 잘 알지 않겠는가?

  이승만 박사에 관하여 미국의 학자들이 쓴 논문을 토대로 시간이 가능한 대로 조금씩 추가할 생각이다. 

 

이승만 박사 프리메이슨 일원

 

  이승만 전 대통령은 조지 워싱턴 대학교를 졸업했다. 이 학교는 유명한 프리메이슨 대학이다. 이승만 박사는 프리메이슨인 조지 워싱턴 동상에 헌화까지했다. 조지 워싱턴 대학교를 졸업한 동문에게는 프리메이슨 남부관할협의회, 곧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 의식의 최고 등급을 수여한다.

  이승만은 프린스턴의 총장이자 나중에 미국의 제28대 대통령에 당선된 토마스 우드로 윌슨 (Thomas Woodrow Wilson, 1856~1924) 밑에서 배웠다. 토마스 우드로 윌슨의 제자가 이승만이다. 토마스 우드로 윌슨은 프린스턴의 총장으로 재직하는 동안에 최초로 유대인과 로마가톨릭 신자를 교수에 임명했다.  그 이유는 장로교 교수를 축소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는 오늘날 외교 위원회(C.F.R.)로 알려진 초기 미국 국제 문제 연구소(American 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s)의 주요 설립자였다. C.F.R. 조직은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Royal 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s, Great Britain)의 외부 계층 조직이다. 이 조직은 미국을 영국 식민지로 탈환한 다음 세계를 영국 통제 하에 통합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조직은 세계정부로 가는 길을 닦는 데 도움을 주는 조직이다.

   이승만(1875년 3월 26일~1965년 7월 19일)은 1904년 11월 4일 한국을 떠나 1940년 12월 3일까지 36년간을 미국에서 살았다. 이승만은 38세에 하와이에 정착하여 25년을 살았다. 이곳에서 다양한 일을 했다. 한인 감리교회를 설립했다. 호놀룰루 한인 YMCA 조직했다. 대한인동지회를 조직했다.

   이승만이 신앙 생활을 했다는 곳은 주로 배제학당(감리교 선교사가 세움)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한글 위키피디아 사전에 보면, " 1910년 10월 10일부터 1912년 3월 26일까지 종로 기독교청년회(한국YMCA)의 총무 겸 학감에 취임하여 교육, 기독교 전도 활동을 하였다. [9]:248 존 모트의 《신입학생 인도》를 번역해 출판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존 모트는 프리메이스으로 영혼 멸절을 주장하는 이단이다. 참고로 감리교도 프리메이슨이 세운 조직이다. YMCA  조직은 역사적으로 프리메이슨이 창설한 조직이다. 기독교의 조직이 아니다. 역사에 무지하여 반기독교적인 조직을 기독교의 한 조직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승만은  4년 10개월 동안 워싱턴 D.C. 등에서 지내면서 프리메이슨 대학교인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마치고, 하버드대학교에서 1년 과정의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프린스톤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  April 1, 1969)에서 2년 만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승만은 41년 동안을 미국에서 지냈다. 모국에는 1945년 10월 4일에 입국했다. 이승만의 생애를 보면 전부 프리메이슨 조직과 관련되어 있다. 감리교도, YMCA도 그가 다녔던 미국의 대학교들도 모두 프리메이슨 대학교이다.  참고로 프린스톤 대학교는 나중에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 조직에 포함된다.

    프린스턴 신학대학교가 일루미나티의 수중에 떨어지기 전에 이 학교는 엄청난 실력을 가진 개혁 신학자들이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미국의 프린스톤 대학교에  탁월한 신약 교수인 존 그레섬 메첸(John Gresham Machen, 1881~1937) 같은 인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치볼드 알렉산(Archibald Alexander, 1772년 4월 17일 – 1851년 10월 22일)는 미국 장로교 신학자로 프린스턴 신학교의 교수였다. 유명한 조직 신학자 찰스 핫지는(1797.12.27 ~1878.6.19 프린스턴에서 소천)은 1851년 부터 1878년 까지 프린스턴 신학대학교의 교장을 지냈다. 세계 3대 신학자로 알려진 개혁 신학자인  워필드(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 1851년 11월 5일 ~ 1921년 2월 16일)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1887년부터 1921년까지 교수로 재직한 신학자이다. 그런데도 나중에 프린스턴 대학교는 악마의 소굴로 변해버린다. 

 

 

이승만 박사는 대통령을 사칭했다.

 

 

  중국 중정 임시정부에서 미국에서 독립운동은 하지 않고 공부만하고 있었는데도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임명했다. 이 당시에 이승만의 나이 45세였다.

    그런데 이승만은 미국에서 자신의 지위 명칭을 대통령으로 사칭했다. 상해 임시정부는 분노하여 이승만을 탄핵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이승만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이승만 각하! 임시정부는 국무총리 제도이고 어느 정부나 대통령 직명이 없으므로 각하는 대통령이 아닙니다.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대통령 행사를 하시면 헌법 위반이며 
신조를 배반하는 것이니 대통령 행사를 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이승만은 도리어 "내가 대통령 명의로 각국에 국서를 보냈으니...지금 대통령 명칭을 변경하지 못하겠소."라고 주장했다. 그런가 하면 한인들이 하와이에서 힘들게 노동하면서 모아 놓았던 독립 자금까지도 가로챘다.  이승만은
독립운동 자금인 하와이 인구세를 직접 관리하고, 임시정부의 정통성까지 부정하였고 심지어 쿠데타 계획까지 세우기도 했다. 참으로 추악하고 파렴치한 자가 아닐 수 없다. 요즘으로 표현하면  공무원자격사칭죄로 징역 3년에 벌금 700만원 이하에 해당된다. 

 

마우스로 클릭(아래의 글)

영상한국사 I 83 임시정부의 대통령 이승만 탄핵 - YouTube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성립기념 사진 1919. 10. 11. 노령·상하이·한성정부가 통합한 직후인 1919년 10월 11일 촬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각료 사진. 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뒷줄 왼쪽부터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이승만은 71세에 한국에 입국하려고 할 때 미국은 입국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프리메이슨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형제단은 프리메이슨 33도인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에게 편지를 써서 한국에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미군정청의 총사령관 존 하지 중장(군단장)에게 지시하여 이승만을 부탁했다. 하지 사령관 역시 프리메이슨이었다. 맥아더가 보내 준 전보의 내용도 이승만이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 사령관은 각별하게 예우를 다했던 것이다.

  우리 나라의 국민은 대부분 영문도 모르고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미국의 명문 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최초로 박사 학위 받았기 때문에 이승만에 관해서 기대도 커서 열렬하게 환영했다. 특히 총사령관 하지 장군이 이승만이 연설하고 있는 도중에 자리에 앉지도 않고 부동 자세로 서서 예의를 다하는 모습을 보고 국민은 이승만이 아주 대단한 인물로 착각했다.

   이승만은 프리메이슨 대학교인 조지 워싱턴 대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에서 1년 반 만에 석사과정을 마치고 프린스톤 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론(Neutrality as Inluenced by the United States, 1910)이라는 논문을 쓰고 2년 만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석학인 것은 맞다. 이승만은 미국인의 정서에 관해서도 매우 잘 알고 있었고 국제 정치 감각도 뛰어났다. 하지만 그의 인품은 별로였다.  명문 대학교를 세 곳이나 졸업하고 박사 학위를 받은 그가 대통령의 직위를 사칭하고 다녔다는 것이 어디 말이나 될 법한 행동인가. 이러한 행위는 국민을 기만한 행위이다.  

 

6.25. 전쟁과 이승만 대통령의 긴급 피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방탄 조기를 입고 수도를 떠나지 않고 있으며, 대통령 부인 조차도 군복을 입고 방탄 조끼를 착용하고 총으로 무장하고 전군과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다. 우크라이 전 대통령은 군인이 싸우는 전투 현장에 직접 방문하여 격려했다. 반면에  이승만 대통령은 6.25 전쟁 때 국민에게 알리지도 않고 대구로 도망쳤다.

   1950. 6. 25. 새벽 4시에 북한의 괴뢰군은 소련제 T-34/85형 탱크 242대, 야크 전투기와 IL폭격기 200여 대, 각종 중야포와 중박격포로 중 무장하고 38선을 넘어 기습 공격했다. 북한의 괴뢰군은 아직 서울 도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6월 28일 새벽 3시에 국민에게 알리지도 않고 은밀하게 경무대를 빠져 나와 서울역에서 특별기차를 타고 대구까지 도망쳤다. 이승만 대통령의 각료들은  너무 멀리 도망쳐왔다는 생각에 다시 열차를 돌려 대전에 도착했다. 
    한강 대교는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에 폭파되었다. 국군 공병감 최창식 대령의 명령을 받은 황원희 중위 등 장교 3명은 이시영 부통령이 다리를 건너오자 곧 바로 폭파시켰다. 그 후에 북한 괴뢰군은 서울을 점령했다.   
   북한 괴뢰군은 한강 이남 쪽으로 건너 갈 생각은 전혀하지 않고 있었다. 그 이유는 남한에서 활동하고 있던 남로당(이헌영)의 좌익 세력이 남한에서 활동하면서 서울만 점령하면 자신들이 남한 전역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남한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북한에 보고하였기 때문에 북한의 괴뢰군은 서울에서 3일 동안을 평안하게 지내면서 아직 한강을 건너갈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이 부분 몇가지 견해가 있음).

   북한 괴뢰군은 서울에 머물고 있는 3일 동안에 체포된 군인, 경찰, 교회의 목사와 성도들을 잡아다가 무차별적으로 대학살을 감행했다. 당시 서울의 인구는 180만 명이었다. 극소수만 피난가고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엄청난 서울 시민이 학살되었다.

   사실 한강의 대교는 전부 폭파된 것이 아니었다. 경인철교 상행선과 바로 옆에 있는 경부복선철교 하행선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우리나라 군인이 2개의 다리에도 폭약을 설치하여 폭파시키려고 시도했으나, 폭약이 폭발하지 않았다. 북한 괴뢰군은 그 사실도 확인하였으나 서울에서 3일 동안이나 쉬고 있었다. 
  

 

독재자 이승만 전 대통령의 만행

 

미군의 노근리 양민 대학살 사건과 그 외에 양민 대학살 사건 조사 내용

    신학자나 목사 중에 이승만 전 대통령을 칭송하는 국민이 있다. 그런데 이승만의 생애에 관한 발자취를 연구하면 추악한 모습이 드러난다. 서양 전문 학자가 쓴 논문을 보면, 이승만 돈을 갈취하는 자였고, 거짓 기독교인이었으며, 독재자인 동시에 학살자로 평가하고 있다.

   이승만을 제대로 연구해야 한다. 이승만 정부의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고려대학교 재학생들은 1960년 4월 18일에 시위를 벌였다. 이승만 정부의 부통령 이기붕은 종로의 조직 폭력배 이정재를 동원하여 학생들을 무차별적으로 집단 공격했다.

  이 사건이 국민에게 알려지자 다음 날 30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청와대를 향해 행진하다가 경찰의 총격을 받고 130명의 학생들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1,000명이 부상을 당했다.

  결국 1960년 4월 26일에 이승만 대통령은 사임했다. 이 부분은 깨끗하게 물러난 대통령이라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고려대학교 학생들과 고등학생의 희생으로 4.19 학생 혁명이 일어났고 국민들도 일어나 결국 이승만 정권의 제1공화국은 종지부를 찍었다. 이승만 정부의 만행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몇 가지만 소개한 것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과 한국전쟁 6.25.

  한국전쟁 때 과연 이승만 대통령이 그 얼마나 기여했는지 외국 학자가 쓴 논문 등을 참고로 정리하여 올린 것이다. 한국전쟁(1950-1953, 6.25)의 원인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사상적인 이념 대립이 원인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소련과 중국은 북한을 포함하여 한반도 전체를 공산권에 편입시키려고 했다.

   북한에 주둔했던 소련군정(1945-48)은 유엔의 지도하에 통일된 하나의 한국정부를 세우는 것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에 따라 북한은 소련의 지휘에 따라 북쪽에 세워졌고, 미국 중심의 유엔군의 의도대로 미군정은 남한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 스탈린의 지원과 중공(현재의 중국)의 모택동의 전폭적인 지지를 확보했다. 북한은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북한은 남한 보다 잘 살았고 소련이 제공했던 각종 군사 장비와 더불어 군사 교육도 철저하게 받아 훈련이 잘 되어 있었다. 전투 능력도 남한보다 월등이 우세했다. 김일성은 남한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남한에 남로당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짧은 기간에 남한 전역을 점령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남한을 기습 공격했다.

   그후 인천 상륙 작전 성공으로 1950년 9월 28일 국군은 6.25전쟁 3개월만에 수도 서울을 완전 수복할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계속 북진하라고 명령했다.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도 UN군에 복진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다급해진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으나 전쟁이 전 세계로 확대될 것을 우려하여 더 이상의 지원은 곤란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반면에 중국의 입장을 달랐다. 중국은 UN군이 북한 전역을 수복하자 일주일 만인 10월 8일에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했다. 역사적으로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중공군은 6.25 초기부터 전선에 투입되었다.  사실 38선은 중국이 개입하기 전에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의 각본에 나와 있었다. 이 글은 두서 없이 쓴 글이다. 시간이 가능한 대로 추가 정리할 것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업적 

   이승만 대통령은 영어를 잘하는 덕분에 아시아 태평양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과 친근하게 지냈다. 그 덕분에 미국 정부의 요직에 앉아 있는 인물들과 교류하면서 지냈다. 그가 미국의 명문 대학교이자 프리메이슨 대학교인 조지 워싱턴 대학을 졸업하면서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 의식의 자격이 자동으로 주어졌고 동문들 중에 뛰어난 프리메이슨들도 많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 5. 2. 자로 프리메이슨 33도인 트루먼 대통령에 한미방위군사협정과 더불어 북대서양조약과 같은 대평양동맹을 요청했으나 미국 정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래도 끈질기에 요청했다. 마침내 성사시키고 유엔군 참전도 이끌어 냈다. 영어를 잘하는 덕분과 조지 워싱턴 프리메이슨 동문회, 프리메이슨 33도인 아시아 태평양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프리메이슨 33도인 트루먼 대통령 등의 도움으로 공산화가 될 위기에서 놓였던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한 공적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업적이다. 그런데도 비난을 받을 부분도 적지 않다는 점이다. 이 부분에 관하여 차후에 시간이 가능할 때 외국의 전문 학자의 논문 등을 참고하여 상세하게 다룰 것이다. 

 

미군정과 국회의원 총선거 실시

   보수 측은 이승만 대통령의 과오를 말하자 않고 오직 공적만 말한다. 진보 측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제외시키고, 상해임시정부만 인정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나쁜 점만 부각시키고 공적은 말하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1945년 12월 27일에 미국, 영국, 소련 등의 외무장관들은 모스크바에서 회의를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이것을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라고 한다. 참석자는 미국의 제임스 번즈, 영국의 어니스트 베빈, 소련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등의 3명의 외무장관들은 합의 조항을 만들고 서로 찬성하고 서명했다.

  미국의 외무장관은 임시정부 수립없이 최소 5년에서 최대 10년 동안 4개국의 신탁통치를 제안했다. 소련은 외무장관은 임시정부 수립을 포함한 공동 위원회를 개최하고 조선의 정당, 사회단체의 참여를 제안했다. 북한은 이미 소련의 지시에 따라 공산화가 진행되었고 찬성하였으나,  미군이 점령하고 있는 남한에서는 맹렬하게 반대했다.

   미군은 1947년 11월에 유엔의 감시하에 남북 총선거를 통해 한국을 독립시키자는 한국통일안(韓國統一案)을 43대 0으로 의결되었다. 이에 따라서 1948년 8월에 ‘UN의 한국 임시 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했다.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은 캐나다, 호주, 인도, 필리핀, 중국, 프랑스, 시리아, 엘살바도르,  우크라이나(불참) 등 8개국의 대표가 도착했다.

   동년 1월 12일에 인도 대표를 임시의장으로 선출했다. 한국인 대표들과 협의에 들어갔다. 1일 21일에 방송을 통해 한국인의 염원인 독립정부 수립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한국의 대표들은 38도선을 넘어 북한 주둔 소련군 사령관에게 면담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소련은 이미 모스크바에서 소집한 3국 외상회의가 있기 전부터 북한 김일성을 중심으로 공산주의를 완성했다.

   결국 1948년 2월 23일에 남조선 과도입법 의원은 선거가 가능한 지역 내의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안을 40대 3으로 의결했다. 3인은 기권했다. 3월 2일에  미군정 장관은 중앙선거위원회 위원 14명을 임명했다. 3월 4일에 유엔 주재 미국 대표는 유엔의 안보리에 한국의 분할 독립의 불가피성을 보고했다. 3월 6일에 미국에서 돌아온 메논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의장이 그 동안의 결과를 위원회에 상세하게 보고했다. 3월 12일에 남한의 총선거 실시안을 상정하여 4대 2로 의결했다. 3월 17일 미군정 법령 제175호로 국회의원 선거 날짜를 5월 9일로 잡았다가 다음 날인 5월 10일로 확정했다. 이것이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총선거를 실시한 것이었다. 

 

 대한민국 정부 출범과 초대 대통령 이승만 

  1948년 5월 27일 국회 예비회의를 소집하여 143명이 참석하여 국회 의장에 이승만 박사를 선출하였고, 신익희, 김동원을 부의장으로 선출했다.  동년 5월 31일에 한민족 역사상 최초로 제헌국회가 개원되었다.  6월 10일에 국회법을 통과시켰다. 7월 12일에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했다. 7월 17일에 헌법 공포식을 가졌다. 7월 20일에 대통령 선거와 부통령 선거에 들어갔다.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이 당선되었다. 7월 24일에 중앙청 광장에서 취임식을 거행했다. 초대 국무총리를 이준석으로 인준했다. 8월 5일에 초대 대법관으로 김병로를 임명하였고, 국회의장으로 신익희가 당선되었다. 이로서 정부의 3부 조직이 완료되었고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전 세계에 널리 알렸다. 이승만 박사는 초대 대통령이다. 합법적이다. 이 부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박정희 대통령의 공과 과오 

   고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도 일본 일왕에게 혈서를 써서 충성을 맹세했다. 일본군 대위로 활동했던 친일 행적과 남한의 남로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김창룡 소령(나중에 장군)이 박정희를 살려주기 위해 사유서를 겸한 신원보증서를 작성하여 김안일 대령(나중에 장군)과 함께 백선엽 대령 당시 정보국장(나중에 장군) 등 3인이 도장을 찍고 풀어주었다.

   박정희의 진술서에 보면, 남로당이 일으킨 대구 폭동에 가담했다가 사살되었던 박정희의 형 박상희(朴相熙)의 집을 찾아갔더니 남로당의 군사부 책임자인 이재복(李在福)이 자신의 조카와 형수를 돌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재복은 형의 복수를 하라고 권하면서 공산당에 가입하라고 권해서 그렇게 했다고 진술했다.

   박정희의 친일 행각이나 공산당에 가입했다가 무기 징역을 선고받았던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국민에게 간첩 누명을 씌어 죽인 점과 독재했다는 나쁜 점도 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반면에 박정희 대통령은 긍정적이고 훌륭한 업적도 남겼다. 새마을 운동(최초 가나안 농군학교 김용기 장로), 경부고속도로, 살림녹화사업, 원자력 발전소, 산업 기반을 다졌다. 방위산업과 미사일 등을 개발하고 핵무기를 보유하려고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현재 전국의 산은 푸르다. 박정희 대통령의 큰 업적이다. 이승만 정부에서도 사방사업이라고 해서 산림녹회 사업을 시작했으나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필자도 젊어서 산에 나무를 심었다. 살림녹화사업 하나만 하더라도 큰 업적이다. 전직 대통령들의 공은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과오도 인정해야 한다. 좋은 점은 칭송하고 나쁜 점은 나쁘다고 해야 역사를 바로 잡고 국민의 분열도 막을 수 있다. 진보 측은 나쁜 점만 부각시킨다. 보수 진영은 좋은 점만 강조한다. 그래서 서로 간에 분쟁이 발생한다. 그 결과는 국론 분열이다.

   참고로 필자는 젊어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만들어진 방위기업에서 근무하였고, 6.25 전쟁 영웅인 김안일 장군 밑에서 신학을 배웠다. 가나안 농군학교의 창설자이시며 대한민국에서 최로로 새마을 운동을 시작했던 선구자인 김용기 장로가 운영하는 가나안 농군학교를 몇 번이나 수료했다.

    공산주의자와 싸운 사단법인 한국기독교멸공협의회 창설자이신 고 박병훈 목사(박정희 대통령과 친하게 지냄, 청와대에서 강의 )의 제자로 이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필자의 부친은 일제감점기 끌여가서 모진 고생을 하였고, 공산당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셨으나 탈출했다.  작은 아버님은 6.25 참전 용사로 소천하여 대전국립묘지에 안치되셨다. 작은 어머님은 독립군의 딸로 국가유공자이시다.

   한편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한국 교계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으신 조직신학 박사인 조석만 박사의 수제자 2인 중에 한명이다.

   필자에게 좌파 논리를 펴고 있다고 착각하는 자가 있어서 기록으로 남긴다. 필자가 극도로 혐오하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면서 공산주의를 칭송하거나 옹호하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국회에서 법을 제정해서라도 국외로 추방시키거나 아니면 북한으로 보내버려야 한다. 헌법에 개인의 자유가 보장한다고 하더라도 공산주의를 칭송하는 것은 대한민국을 배신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행위는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자이다. 국민의 자격이 없는 자이다. 국민 중에 애국 운동을 단 한번도 안해 본 사람이 마치 애국자처럼 행세하는 것도 꼴볼견이다. 

 

이승만 박사는 프리메이슨 33도인 더글라스 맥아더 사령관과 같은 형단이다. 아시아 태평양 총사령관 맥아더의 도움을 받아 한국에 입국했다. 

 

미국의 33대 대통령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도 프리메이슨 33도였다. 

 

 

한국법에 관한 서양 법학자: 역사적 고찰

"Western Jurists on Korean Law: A Historical Survey"

논문 181쪽, PDF 15쪽 내용

President Syngman Rhee ruthlessly oppressed his political opponents.

이승만 대통령은 정치적 반대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For the United Nations Command, Rhee was a hard and troublesome man to deal with, and that was true because of his undemocratic attitude not only in domestic affairs, but also in international and military fields.

유엔군사령부에서도 이승만은 다루기 힘들고 골칫거리였으며 국내 문제뿐만 아니라 국제 및 군사 분야에서도 그의 비민주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유튜브(YouTube)를 보면, 의사면허를 가진 김사라 여자 목사는 남한이 북한을 선제 공격해야 한다는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거두절미하고 신구약 성경에는 그런 계시가 없을 뿐만 아니라 거짓 선지자의 주장에 불과 할 뿐이다.

    현대 시대에 대한민국 국민 중에 전쟁에 참상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물론 6.25 참전 용사들이나 한국전쟁 시대에 살았던 분들은 잘 알 것이다.

   그러나 북한군의 양민 대학살 만행만 알고 있을 뿐, 미국도 남한의 양민들을 대학살하였다는 역사적인 사건을 아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모든 것을 파괴시킬 것이다. 만약 남한과 북한이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 피해와 참상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 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쪽이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하더라도 다시는 한강의 기적같은 것은 없을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미국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

   18세기 필리핀 국민들은 스페인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분연히 일어나 싸웠다. 그 후에 미국들이 개입하여 필리핀 국민 100만명을 대학살 하여 인종 대청소의 만행을 저질렀다. 6.25때도 미군들은 대한민국의 양민 100만명을 대학살했다. 이것이 전쟁의 참상이며 역사이다.

   물론 미국은 6.25 때 대한민국을 위해 피흘러서 싸웠다. 대한민국과 혈맹 관계이다. 필자도 한미동맹은 굳건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역사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자취는 바르게 고증하고 넘어 가야 한다. 국제사회는 피도 눈물도 없다. 국력이나 군사력이 약하면 강대국에게 먹히는 것이다. 반드시 우리의 힘으로 자주 국방을 실현해야 한다. 인터넷이나 책에 6.25 전쟁으로 입은 남한의 군인들의 피해와 국민의 피해 보다 미군이 학살시킨 숫자가 더 많다는 점도 알고 넘겨가야 한다.

 

종복 세력의 망언

   카페지기는 이른 바 종북세력이라는 사람들이 쓴 문건을 본 적이 있다. 그 내용에 "철조망을 철거하고 군부대는 철수하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내용은 대한민국 내부에서 버젖이 뿌려지고 있고, 공개적으로 활동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우리는 북한의 위협에 대한 현실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북한을 옹호하는 자들에 관한 법을 제정하여 국외나 북한으로 추방시켜야 한다.

   요즘 북한의 땅굴 문제가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북한은 남침용 땅굴을 지속적으로 파내려 왔을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군대의 지휘관은 감상적인 사고에 젖어 땅굴을 굴착하였을 때에 토사를 처리하는 문제를 놓고 대형 트럭 몇 만대에 해당되기 때문에 인공 위성을 통해 충분하게 식별이 가능하다는 논리를 내세워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북한의 지하철은 지하 100-150미터 아래에 있다. 이것 하나만 보아도 북한이 땅굴을 파는 능력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베트남의 구찌 땅굴은 호치민에서 대략 75킬로 떨어진 곳에 위치 한 곳으로, 베트남 전쟁 당시에 베트콩들이 캄보디아 국경 부근에 근거지를 두고 호치민을 공격하기 전에 이미 오랜 세월 동안에 땅굴을 파서 지하요새를 만들었다.

    이 땅굴은 원래 프랑스의 침략에 대항하려고 주후 1948~1954년 사이에 인도차이나 전쟁 때 48km의 땅굴 지하요새를 만들었다. 그 후에 베트남 전쟁 무렵인 1967년까지 200킬로를 더 파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구찌 지하 터널의 경우 그 깊이기 30m이며, 지하 3층 규모로 만들어진 땅굴이다. 북한의 남침용 땅굴은 반드시 존재한다.

    그러나 100지하 아래서 파내려 왔다면, 그것을 탐지하기란 대한민국의 현대과학 기술로 파악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북한의 땅굴을 대비하기 위한 수단으로 두 가지를 취해야 한다고 본다.  

   첫째, 북한이 남한을 가로질러 파내려 온 것으로 판단되고 있기 때문에 남한의 휴전선 부근을 가로 질러 지하 100미터 이상으로 굴착하는 방법이다. 핵 전쟁을 대비한 대피처라는 명분을 내세우면 국민의 공감대를 형성 할 수 있다고 본다. 

  

  둘째, 남한도 기술력을 동원하여 북한처럼 북침용 땅굴을 파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천문학적인 돈이 투입되어야 한다. 따라서 통일을 대비한 지하철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우리도 지하 100미터 아래에 지하철을 파는 것이다. 이것도 핵전쟁 때에 국민의 대피용으로 사용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면 국민의 충분한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본다. 통일을 대비하여 지하철과 지하도로를 건설하는 방법으로 건설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물론 막대한 자금이 문제가 될 것이다. 국민 중에 일부 인사가 땅굴 찾기 노력은 한계가 있다고 본다. 

 

   우리 국민의 시급한 과제는 북한의 침략도 막아야 하겠으나, 외세가 개입하였을 때, 마치 신라가 당나라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제국을 무너뜨린 것과 같은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도 엄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북한을 믿을 것인가? 북한은 더욱 믿지 못할 족속이다. 차리 한미상호방위조약(한미동맹, 1953. 10. 1.)을 체결하고 이제까지 동맹국으로 지위를 이어 왔으나 북방정책(중국, 러시아, 북한)을 취하는 것보다는 남방정책을 취해야 대한민국이 살 길이다.

 

    미국은 전 세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달러를 찍어내고, 지배하고 있는 나라이다. 미국은 전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나라이다. 미국은 영국, 호주, 캐나다, 일본, 이스라엘 등의 유럽 국가와 나라들을  움직일 수 있다. 지난 역사를 상기하여 보라! 대한민국의 안보정책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한미상호방위조약(한미동맹, 1953. 10. 1.)이 답이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 민족과 나라는 희망이 없다.

 

 헬라제국(그리스제국)의 알렉산더가 죽자 그 나라는 4개국으로 분열되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톨레미왕국(이집트)과 시리아의 셀레우크스 왕국의 중간에 위치하여 있었다. 바로 신구약시대의 중간기었다. 이스라엘은 시리아의 셀레우크스 왕국의 제8대 왕으로부터 엄청난 박해와 대학살을 경험했다. 그들은 봉기를 일으켰다.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성전을 회복하고 마카비 왕국(하스몬가)을 세웠다. 마카비 왕국은 당시 서양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로마제국과 우호동맹을 체결했다.

 

   기원전 63년에 로마제국의 폼페이 장군은 파죽지세로 중근동을 공포로 몰고 갔다. 그런데도 작은 나라 이스라엘은 침략하지 않았다. 우호동맹을 체결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이스라엘 마카비 왕조는 형제들이 왕권과 제사장직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폼페이우스 장군에게 자신들의 나라를 다스려 달라고 요청했다. 폼페이우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스라엘을 침략했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안보는 어느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다. 국민들이 알아서 해야 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나라도 안보는 국정의 최고 중요한 과제이다.

 

한국기독교정보학회

카페지기 안병삼 박사~~   

   

 

 

아래의 글은 미군들이 대한민국의 양심들을 대학살한 내용들은 교사들이 조사한 보고서이다.

30쪽으로 되어 있는 이 문건을 보면, 전쟁의 참상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게 된다.

다시는 이 땅에 민족상쟁의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될 것이다. 전쟁은 사탄을 숭배하는 자들의

전유물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양민 대학살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HWP]'미군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에 대한 지난 1999년 미국계 ...

chamsil.eduhope.net/.../20052학기정기답사자료집(최종본)(0)(0).hw...

미군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에 대한 지난 1999년 미국계 통신사(AP)의 발표를 계기로 6․25전쟁 중에 저질러진 양민학살(혹은 민간인학살) 일반에 대해 관심이 고조 ...

 


이승만 정부의 양민 대학살

-한국전쟁 전후 타 지역 양민학살-
     
◎ 미군의 직접적인(폭격과 기총사격) 양민학살

 학살시기
 장소
 내용 및 사상자수
  1950년7월     
충북 영동군
노근리
충북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철로변 미군폭격기의 폭격과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을 1백여m 떨어진 쌍굴 다리로 몰아넣고 사흘동안 총질을 함 이 사건으로 최소한 3, 4백여 명의 무고한 양민들이 미군에게 학살당했다.
1951년1월20일
충북단양군 영춘면
흰옷가지를 흔들며 ‘살려달라` 고 외쳐대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미군 전투기의 폭탄과 총탄을 내리 쏟아,
주민과 피란민 300여 명이 사망.
또한 마을을 향해 폭탄을 퍼부었다.
1950년 7월말
대전시 유성구
계산1동
마을 상공에 미군 전투기 4대가 날아와 기관총을 난사해 주민과 피난온 노인, 어린이등 양민 50여 명이 숨졌다.
1950년 8월3일
경북 칠곡군
왜관읍 왜관교
미군은 낙동강 연안의 왜관교를 폭파시켜버렸다.
그때 그곳에는 미군과 피란민 밖에 없었다. 다리 건너편에선 미군들이 피란민들을 다리로도 물로도못 건너오게 총을 쏘아댔고 이로 인해 수백명의 피란민들이 숨졌다.
1950년 8월초
경북 고령군 성산면 고령교
왜관교와 같은 이유로 폭파됐고 이 과정에서 수십-수백 명의 피란민들이 학살당했다고 밝혀지고 있다.
1951년 1월 19일
예천군 보문면
산성리
미군 전투기의 무차별 폭격으로 산성리 마을에는 49명의 희생자와 90여 명의 부상.  그 중 임산부도 6명이나 포함되었다.
당시,미군은 정찰기로 낮게 날며 산성리를 살폈다.그 정도면 그들은 산성리에 적이 있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었다.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산성리에는 인민군도 전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은 정찰기가 돌아간 후 바로 뒤에 마을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렸다.
1950년  12월
28일 (음력)
의성군 금성면
제오2리
미군 폭격기 4대가 20여분 동안 폭격.
 그 날의 폭격으로 17명이 사망했고 21명이 부상을 당했다.


1950년 8월 16일~9월 2일
포항지역
미군 전투기 20여대가 포항시 청하면과 신광면에 기관총과 폭탄을 퍼부어 마을 주민 32명이 사망. 2명부상. 또, 피란민 1천여 명이 모여 있던 송골계곡에 여남 앞바다에 있던 미군 함정이 30여 분간 수 백발의 함포 사격. 36명이 목숨을 잃었다.
50년 8월 16일
경북 구미
미군폭격기 7대가 구미시 형곡동의 큰 건물을 중심으로 수일간 폭탄 수십 발을 발사해 1백여 명이 숨졌다.
 50년 음력 7월 2일 오전 9시경 피난 생활을 하고있는 주민 50명을 향해 미군 폭격기가 총을 쏘아 18명이 사망.
1948년 6월
경북 울릉도
독도 근해에서 조업 중이 수십 척의 우리 어선에 무차별 
폭격을 가해 150명 이상의 어부들이 실종되거나 숨졌다. 
 1950년 8월
경남 사천시
곤명면 조장리
미군폭격기 4대가 수백의 주민들을 향해 기총을 난사해 54명이 목숨을 잃고 57명이 총상과 파편에 의한 중상으로
그 중 14명이 후유증으로 숨졌다.
1950년 8월초
경남 창녕군
창녕읍 여초리
초막골
미군이 인민군에게 밀리자 불안한 마을 주민들이 무리 지어 미군부대 쪽으로 향했다. “팍팍팍” 갑자기 예상치도 못한 총알이 앞에서 날아왔다.그런 상황이 세 번이나 계속됐다. 앞으로 나가면 미군 총에, 남아있자니 폭격이 무섭고 그런 상황에서 60여명이 숨지고 2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1950년 8월초
마산
진정면 곡안리
피난해 있던 주민 100여 명을 미군이 11일 오전 8시부터 기관총과 소총으로 집중 사격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 등 83명을 현장에서 숨지게 했다.
1950년 8월초
마산시
신포구 신장면
뒷산에 있던 주민 100여 명에게 무차별 총격. 83명 사망.
1950년 8월 22일
경남 의령
용덕면 정동리
미군 전투기 4대가 마을에 기관총 난사와 폭탄을 투하,
 이 사건으로 마을 가옥 250여 채 중 100여 채가 불타고, 마을 주민 33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다쳤다.
1950년 7월 11일
전북
익산 이리역
역 상공에 성조기가 그려진 B-24폭격기가 폭탄을 투하.
이 폭격으로 54명 사망 300여명 부상.
1951년 1월 12일
함평군 해보면
주민 230여 명을 길가에서 무차별 학살하였다
1950년 8월 3일
전남
여수 해역
미군기의 기총 사격으로 피난민과 어부 140여 명이 사망.
1950년 12월 22일
전북 고창군
피난민들을 바닷가로 끌고가서 어린이, 부녀자, 노인까지 500여 명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또한 51년 1월 5일 성동리 성산마을에서는 피난민 500여 명을 기관총 난사로 무차별 학살.


◎ 미군의 간접적인 양민학살(보도연맹)

 학살시기
 장소
 내용 및 사상자수
1950년 7월 15일
마산

군과 경찰에서는 시민극장에서 시국강연회가 있다고 보도연맹 가입자를 포함한 양민들을 집합. 삽과 괭이 등을 들려 도로보수공사를 하러간다는 구실로 트럭에 실어서는 창원군 북면 뒷산과 진해 앞바다에서 각각 수장과 총살을 감행했다 한다. 


1950년 7월말
진주
진주 형무소에 정치범과 보도연맹원들도 200여명의 사람들이 총살되었다. 미 국립문서 보관소 기밀해제에 따라 한림대에서 영인발간한 해방일보 1950년 9월 3일자에는 진주 명석면을
비롯, 산청 하동 등지에서 모두 5,000여명이 학살됐다.

경상도의
기타지역
이밖에도 창녕⋅함안⋅김해⋅의창⋅고성⋅삼천포⋅사천⋅거제⋅통영⋅남해⋅하동 등 도내 전역에서 보도연맹원 학살이 자행됐다. 내륙지역의 경우 주로 산골짜기에서 총살하는 방법이 동원됐고, 해안지역은 바다에 수장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1950년9월16일~12월18일
경기도
일대
<적색숙청>명분으로 조작된 <강화향토방위특공대>는 강화양조장과 경찰서 유치장에 무고한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가두고 고문을 가한 끝에 해변가로 끌고 가서 비밀리에 살해했으며 갑곶리 나루터와 옥계 갯벌로 끌고 가 학살하고 썰물 시간에 맞춰 시체들을 바다로 수장하였다.
<강화특공대>에 의해 두 달 기간에 무려 300여명이 살해되었으며 이외 면 단위의 <특공대>에 의한 학살자 수까지 합치면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다.
 서울에서는 <빨갱이 수색참모부>를 만들어 거리의 곳곳에 검문소를 설치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 학살하였으며 <부역법>까지 만들어 친척이 의용군에 나갔거나 조금이라도 북한군과 관계가 있는 사람은 모조리 검거투옥하고 그 중 72,390여명을 고문, 학살하였다. 홍재동에서만도 단 하루동안 여인과 어린이를 포함한 800여명이 양민들이 무고히 목숨을 잃었다. .
 인천항에 상륙한 미군은 국군에게 명령을 내려 첫 하루동안 1,300여명의 시민을 학살한데 이어 9월 28일부터 11월 13일까지 55,909명의 주민들을<공산분자>로 매도해 검거 투옥, 학살하였다. 인천시 금곡동 지구에서만도 1,500여명의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2,700여명이 학살되었으며 경기도 김포군 일대에서도 1,000여명이 생매장 당하였다


 1950년 8월 14일
경남 통영.거제.진영 양민학살
인민군이 이곳을 점령했다가 해군이 한산도 앞 상륙작전에 의해 이틀만에 밀려난 곳이다. 해군의 통영 상륙과 함께 지역민 출신으로 구성된 해상방위대와 G2(해군첩보대)는 인민군에게 식량을 제공했거나 밥 한끼라도 해 준 사람을 모두 부역자로 몰아  평소 사감이 있던 사람들까지 무차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학살된 민간인은 800여 명 이었다.


1950년
10월 9일
금정굴
경기도 고양시 일대에서 우익단체인 태극단과 경찰, 일부 주민이 공산주의자 가족이나 북한군 점령기간 부역을 했던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을 대량 학살. 95년 유가족들의 요구에 의해 발굴된 고양시 금정굴의 유골은 모두 1300여점으로 당시 유골을 감정한 서울대 이윤성 교수는 “유골 조사 결과 한국전쟁 당시 최소한 1백60여명이 사망했으며 대부분 사망원인은 총상으로 추정된다.” 고 발표.


1950년
7월~8월
경북 경산
코발트폐광 학살
군(CIC)과 경찰에 의해 보도연맹에 명단이 올라있던 사람들이 밤사이에 경산의 코발트 폐광으로 끌려갔다. 일제시대 때 개발되고 해방되면서 곧바로 폐광이 된 광산에 수직굴 구덩이에는 물이 고여 있었는데 처음에는 그 구덩이로 사람을 던져 넣어서 수장을 시켰다. 물구덩이가 시체로 차 오르자 이번에는 총을 쏘아가며 양민들을 굴속으로 파묻어 버렸다. 100m가까이 되는 수직 굴은 시체 굴이 되었고 그도 모자라 옆의 골짜기에서 총살하고 흙으로 덮어 버렸다.
1950년
12월 5일
함평월야면
정산리 동촌마을

불시에 기습하여 20분도 안되는 사이에 50여 가구의 온 마을을 불바다로 만들고 노인들과 부녀자들이 대부분인 주민들을 끌어내어 기관총과 소총으로 모두 사살했다. 이틀후, 월애면 월악리의 내동, 못간, 순촌, 송계, 동산, 괴정 등 6개 마을을 기습 포위하고 집집마다 불을 지른 다음 ‘도로 복구공사 하러 가니 나이에 관계없이 모두 나와라, 안나오면 총살하겠다.`고 위협하며 주민들을 끌어 내여 무차별 총포 사격을 가했다. 도로복구 공사하는 줄 알고 삽과 괭이를 들고 나왔던 주민 300여명은 국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했다.
 이 살인 부대는 다음해 1월 12일 함평군 해보면 상곡리 주민들을 길가에서 230여명이나 사살하였으며, 당시 기적적으로 살아난 생존자들과 목격자들은 군 당국이 함평 에서 사살한 1,000여명의 민간인들을 공비사살 숫자로 조작하고 마을이나 들에서 회수한 괭이나 삽을 공비로부터 노획한 무기숫자로 둔갑시켜 여론화했다고 증언했다.


1950년 7월
전남
해남과 완도
<영광작전>으로 불리던 국군과 경찰의 전라남도 방어작전이 실패하자 나주부대는 패주하면서 인민군으로 가장하고 해남과 완도지역에서 우익인사를 오랏줄로 묶어 앞장세우며, “인민군대가 왔으니 환영 나오라, 안나오면 반동으로 취급할것”이라고 위협한 다음 중학교 마당에 나온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해 해남읍과 완도읍을 시체더미로 만들었다.


1950년
7월~9월
부산
김해
양산

 전국각지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북적대고 있던 부산에서는 정치범으로 유치장과 부산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이 집단 총살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외에도 보도연맹원들은 부산 사하구 골짜기에서 3일간에 걸쳐 수백여명이 학살당했고, 부산 전역에서 희생된 비무장 민간인은 1만명대로 추산되고 있다.
김해군 전역과 의창군 일부 각 지역에서 보도연맹원 7백50여명이 집단 학살되었다. 김해군내 으슥한 골짜기에서 보도연맹원들이 작게는 3명씩 많게는 10명씩 손목과 발목이 묶인 채 총에 맞아 죽었다. 경남 내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죽었다는 양산은 그 숫자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1950년
7월~9월
울산
(오복고개,
대운산 골짜기)

1950년 7월중순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이 있었다. 각 읍, 면 단위로 보도연맹원을 지서에 소집, 울산경찰서(현 북정공원)로 이송하여 유치장과 경찰서 뒤편의 무도장, 농협 창고에 가두어 두고 취조와 고문을 했다.
(유치장에서 심한 고문과 제대로 먹지 못해 죽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7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7, 8회에 걸쳐 날씨가 흐리거나 비오는 밤에 호명하여 트럭에 싣고 대운산 골짜기, 웅촌면 오복리에서 무참히 학살당했다.
밝혀진 피학살자 수는 869명, 생존자는 1명(현재 사망)
증언조사 과정에서 이보다 더 많은 사람이 학살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답사 지역 지도1 중구지역 - 북정공원, 백양사


☰답사 지역 지도2 울주군지역 - 웅촌대복고개, 대운산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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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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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필레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3.05 감정적으로 논하지 마시고 공정하고 정당하게 공과 사에 대하여 객관적인 증거와 팩트가 정확한 부분을 가지고 비평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점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성숙하게 만들고 발전하게 만듭니다. 말 장난이나 비난은 아주 나쁜 심성입니다.
  • 작성자필레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3.05 이승만 전 대통령이 아무리 많은 공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국민을 100만 명 넘게 학살했다면 대단히 문제가 많은 것이지요.
  • 작성자필레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3.05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기에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무고한 국민 수 천명을 학살했다.
    https://namu.wiki/w/%EA%B2%BD%EC%82%B0%20%EC%BD%94%EB%B0%9C%ED%8A%B8%EA%B4%91%EC%82%B0%20%ED%95%99%EC%82%B4%EC%82%AC%EA%B1%B4?from=%EA%B2%BD%EC%82%B0%20%EC%BD%94%EB%B0%9C%ED%8A%B8%ED%83%84%EA%B4%91%20%ED%95%99%EC%82%B4%EC%82%AC%EA%B1%B4
  • 작성자필레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3.07 이승만 박사의 두 얼굴을 가진 위선적이고 악마적인 행위를 전문적인 기록을 토대로 시간이 가능한 대로 추가할 것입니다.
  • 작성자필레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3.12 이승만 대통령에 관하여 공과 과오에 관하여 요약하여 올렸습니다. 시간이 가능할 때 다시 정리하거나 내용에 초가될 수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에 관하여 반쪽 짜리 생각을 버리고 공과 과로를 모두 인정하고 넘어가자. 선거에 이용하지도 말고 역사 기록에 있는 그대로 알고 넘어 가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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