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역사와 시대 탐색

이승만은 국부인가?

작성자융제|작성시간26.06.16|조회수15 목록 댓글 0

 

이승만을 국부라 부르는 순간, 누군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이다. 부정선거, 발췌개헌, 사사오입,

그리고 4월의 거리에서 쓰러진 학생들.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를 국부라 칭할 수 있는가?

이 글의 답은 '그렇다'라는 것이다. 다만 그 답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리가 '국부'라는 말로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부터 다시 물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먼저 합의할 수 있는 지점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헌정 공동체에는 기원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기원을 어떻게 기억하느냐는 단순한 호사가

아니라, 그 공동체가 자신을 어떤 원리 위에 세워진 존재로 이해하느냐의 문제다. 이것은 진영을

막론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전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 기원의 시점을 어디로 잡느냐,

그리고 그 시점을 만든 사람에게 무엇을 부여하느냐다.

 

대한민국의 기원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개의 시계가 동시에 돌아간다. 하나는 1919년, 다른 하나는

1948년이다. 만일 우리가 이 둘을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다루는 순간 논쟁은 진영전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이 둘은 사실 서로 다른 질문에 대한 답이다. 1919년은 정통성의 질문에 답한다. 무엇을 향한

운동이었는가? 그 정신적 맥락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그러나 1948년은 실체의 질문에 답한다.

영토와 국민, 실효적 정부, 그리고 다른 국가들과 관계를 맺을 능력을 갖춘 정치체가 언제

성립했는가?

 

이 구분이 자의적이라고 생각할 독자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임시정부 자신의 언어를 들여다보자.

1941년에 반포된 건국강령은 강령, 복국, 건국의 세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건국을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과업으로 설정한 것이다. 만약 1919년에 이미 건국이 완성되었다면, 임시정부 스스로가

건국을 미래의 일로 적어둘 이유가 없다. 또한 제헌헌법이 1948년의 정부 수립을 '재건'이라 표현한

것도 같은 논리 위에 있다. 이미 있던 정신을 다시, 이번에는 실체를 갖춘 형태로 세운다는 뜻이다.

따라서 정통성은 1919년에서 흘러나오고, 실체는 1948년에 성립한다. 이 둘은 충돌하는 두 주장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를 설명하는 두 개의 층위다.

 

이제 1948년을 건국의 시점으로 당신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자리에 한 인물의 이름이 놓인다.

바로 이승만이다. 여기서부터 진짜 질문이 시작된다. 건국의 시점에 그가 있었다는 사실과, 그에게

국부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것은 과연 같은 문제인가?

 

많은 사람이 이 둘을 같은 문제로 여기기 때문에 논쟁이 격해진다. 이승만이 부정선거를 저질렀고,

독재했으니, 그에게 국부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붙이는 것은 곧 그 죄를 면제해 주는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부'라는 칭호가 무엇을 평가하는 말인지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헌법을 만드는 권력과 헌법안에서 행사되는 권력은 서로 다른 권력이다. 그리고 정치철학은 이를

제헌권력과 제정 권력으로 구분해 왔다. 제헌권력이란 공동체의 기본 규범 자체를 창설하는, 체제

바깥에서 체제를 만드는 힘을 말한다. 그리고 제정 권력이란 그 규범이 만들어진 이후, 그 틀 안에서

대통령으로서, 국회로서, 행정부로서 행사되는 힘을 뜻한다. 따라서 1948년의 이승만은 제헌의회의

의장이었고, 헌법을 공포하고 정부 수립을 선포한 자리에 있었다. 이것은 제헌권력의 영역이다.

반면에 1952년 부산정치파동, 사사오입 개헌, 1960년의 부정선거는 모두 그가 이미 만들어진 헌법의

틀 안에서, 현직 대통령으로서 행사한 권력이다. 이것은 제정 권력의 영역이며, 동시에 그 권력의

실패다.

 

결국 같은 사람이 행사한 권력이라 해서 그 권력들이 같은 종류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와, 그 건물에 입주해 건물을 훼손한 입주자가 동일인이라 해도, 설계의 가치와

입주자로서의 행적은 별개의 평가 대상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1952년 이후의 실패가 1948년의

행위를 거슬러 무효로 만든다는 주장은, 제정 권력의 실패를 제헌권력의 정당성에 소급 적용하는

것인데, 둘은 범주가 다른 권력이기에 이 소급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본다. 따라서 국부라는 칭호가

가리키는 것은 정확히 제헌권력이 행사된 그 지점이다. 그 인물의 통치 전체에 대한 도덕적 총평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구분에 의문을 제기할 또 다른 독자가 있을 것이다. 제헌권력은 이승만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198명의 제헌의회 의원이 있었고, 헌법기초위원회가 있었다. 왜 그 칭호가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가?

그러나 이것은 비단 이승만에게만 적용되는 문제가 아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라 불리는

인물들도 헌법제정회의에 모인 55인 중 일부였다. 따라서 제헌권력이 집단으로 행사되었다는 사실과,

그 과정의 상징적 구심점에 칭호가 부여되는 관행은 모순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승만은 그

구심점이었다. 정부 수립을 대내외에 선포한 자리에, 그가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하겠다. 이 글이 말하는 '국부일 수 있다'라는 말은 그의 통치 전체가

정당했다는 뜻이 아니다. 부정선거는 부정선거이고, 발췌개헌은 발췌개헌이며, 4월의 희생은 그

자체로 기억되어야 할 역사다. 다만 이 글의 주장은 그 평가와 국부라는 칭호가 서로 다른 층위에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한 인물이 헌정질서의 기점에 섰다는 역사적 사실과 그가 이후 그 질서를 어떻게

운용했는가에 대한 평가는 각각의 자리에서 각각의 진실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논증은 1948년을 건국의 시점으로 받아들이는 견해를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1919년을 건국의 유일한 기점으로 보는 견해에서는, 이 논의 자체가 출발점부터 달라진다. 그 경우

'이승만이 국부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다른 형태로 제기되어야 하며, 이 글의 답은 그 입장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칭호 자체의 논리가 흔들리는 문제가 아니라, 건국이 언제 일어났는가에

대한 더 근본적인 질문이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공화국은 신화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자신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는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시작의 자리에 누가 있었는가를 인정하는 일과, 그 이후의 모든 행적을 면죄하는 일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이승만을 국부라 부르는 것은 후자가 아니라 전자다. 그리고 이 구분을

 

 

- 받은 글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