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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비평 공간

[킹콩] 미학과 정치학의 딜레마

작성자맑은영혼|작성시간06.02.23|조회수41 목록 댓글 0

미학과 정치학의 딜레마

피터 잭슨의 <킹 콩>

 

정영권/영화평론가

 

 

영화사 최고의 리메이크 작인 동시에 진보하지 않은 오리엔탈 판타지로 양분된 평가를 받고 있는 <킹 콩>

▲ 영화사 최고의 리메이크 작인 동시에 진보하지 않은 오리엔탈 판타지로 양분된 평가를 받고 있는 <킹 콩>

피터 잭슨의 꿈의 프로젝트는 <반지의 제왕 The Lord of the Rings> 시리즈가 아니라 <킹 콩 King Kong>이었다. 9살 때 TV에서 1933년 작 <킹 콩>을 통해 판타지와 영화의 힘을 깨닫게 된 그의 영화인생은 <킹 콩>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시나리오 초고를 쓴 지 10년 만에 2억 700만 달러라는 엄청난 제작비를 들여 드디어 <킹 콩>을 완성했다.

 

메리안 C. 쿠퍼와 어니스트 쇼드색이 만든 1933년 오리지널 <킹 콩>을 공공연하게 들먹이며, 거의 그대로 리메이크하겠다던 피터 잭슨은 과연 그 약속을 지켰다. 영화는 1시간 40분의 오리지널 보다 두 배 가까운 3시간 분량으로 늘어났지만 기본적인 플롯과 캐릭터에서 크게 달라진 점은 없다. 볼거리가 훨씬 많아졌다는 것과 기본 플롯은 유지하되 좀 더 디테일해졌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피터 잭슨은 캐릭터와 서사의 얼개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1930년대의 이미지 도상학이 표현했던 당대의 이데올로기마저 그대로 가져온다.

 

진보하지 않은 오리엔탈 판타지

 

20세기 초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극에 달했을 때, 서구의 문학은 모험, 탐험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서구 이외의 지역을 타자화 시켜 왔다. 서구의 탐험가들이 오지를 탐험하면서 겪게 되는 아슬아슬한 모험의 긴장은 그 자체로 흥미를 안겨 주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러한 모험 소설에서 동양은 날 것 그대로의 야수성을 지닌 것, 혹은 문명의 손길이 채 닫지 않은 주술적 신비주의의 양상으로 왜곡되어 나타났다. 오리지널 <킹 콩>의 개봉 전후 시기인 1930년대 역시 식민주의의 영향 아래 '오리엔탈 판타지'가 성행하던 시기였다(영화로 나타난 가장 대표적인 예는 1930~40년대를 풍미했던 숱한 <타잔 Tarzan> 영화들이다).

 

피터 잭슨의 <킹 콩>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가 담겨 있던 오리지널 <킹 콩>의 2005년 버전이다. 그로부터 7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건만 도상적으로 나타나는 이데올로기에 있어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 야심만만한 영화감독 칼 덴햄(잭 블랙)을 비롯한 영화제작진, 항해사, 사냥꾼 등 일련의 '모험가'들은 영화를 찍기 위해 해골섬이라 불리는 동양의 미지의 섬으로 향한다.

 

<킹 콩>에선 동양계 원주민의 섬을 괴물스런 장소로 그려낸다.

그 곳에서 그들은 거대한 짐승들을 숭배하는 원주민들을 만나게 된다. 이 원주민들의 기괴한 모습은 1933년 작보다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눈을 까뒤집고 이상한 소리로 주문을 외며 칼 덴헴 일행을 잔인하게 죽이는 이들은 무슨 악마숭배집단처럼 보일 지경이다. 킹 콩 역시 보다 인간적인 감정을 부여 받긴 했지만 강한 유색인종 남성의 문명화되지 않은 야수성을 대변하는 것은 동일하다. 당연히 백인 모험가들(한 명의 흑인이 용감한 항해사로 등장하지만 공룡들과의 싸움에서 죽음을 맞는다)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블론드의 백인 여배우 앤 대로우(나오미 왓츠)를 그로부터 구출해 내야 한다. 그것은 야수적인 폭력 앞에서 무력한 그들의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피터 잭슨은 앤 대로우를 구출하기 위해 싸우는 해골섬을 말 그대로 괴물스러운 장소로 만든다. 물론, 이는 오리지널 작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기술이 재현해 내지 못했던 온갖 흉물스러운 생명체들이 곳곳에서 튀어 나온다. 공룡은 말할 것도 없고 게와 지네를 닮은 동물들을 포함해, 에일리언을 연상시키는 흉측한 생물들은 정말로 폭력적인 남근(phallus)성을 드러낸다. 피터 잭슨 초창기 영화의 악취미를 기억하는 매니아들은 열광할 만한 장치이기도 하지만 영화 곳곳에 내장돼 있는 괴물적 남성성은 어딘지 섬뜩한 데가 있다.

 

영화사 최고의 리메이크 작

 

오리지널 1933년 작이 그러했던 것처럼, 당연하게도 킹 콩은 처단된다. 폭력적인 야만성을 통제할 수 있다고 광신했던 백인들의 오만함은 산산조각 나고, 킹 콩은 그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대가로, 대도시 뉴욕의 고도 문명을 상징하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아래로 추락해 죽음을 맞게 된다. 야수는 죽어야 한다.

 

압도적인 비주얼과 함께 킹 콩과 앤의 사랑의 감정 또한 애틋
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혼란을 겪어야 한다. 오래 된 대중영화의 리메이크는 대부분 새로 제작되는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1956년 작 <신체강탈자들의 침입 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이 내포했던 냉전 시대 반공주의의 광기는 1993년 작 <바디 에이리언 Body Snatchers>에서 에이즈 확산에 대한 공포로 바뀌어 나타났다.

 

아주 가벼운 예로 1960년대 <초대받지 않은 손님 Guess Who's Coming to Dinner>에서 흑인 사위를 맞는 백인 중산층 가족은 <게스 후? Guess Who>에서 백인 사위를 꺼리는 성공한 흑인 가족으로 바뀌어 있다. 피터 잭슨의 <킹 콩>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들과는 일찌감치 담을 쌓은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배경 역시 오리지널 작이 만들어졌던 1930년대를 그대로 재현하면서, 오로지 변화한 것은 기술의 진보일 뿐이라고 강변하는 듯 하다.

 

우리의 혼란은 바로 거기에서 싹튼다. 기술적인 혁신과 진보에 탄탄히 뿌리박고 있는 이 초특급 블록버스터는 대중영화로서 갖춰야 할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피터 잭슨은 킹 콩과 사나운 공룡 세 마리의 대결 장면을 압도적인 비주얼로 형상화하는 것을 비롯해 해골섬에서의 치열한 싸움과 숨 막히는 모험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으로 풀어 낸다. 긴장과 이완의 반복은 완벽할 만큼 정확한 타이밍으로 전개되고, 여배우 앤과의 감정교류는 너무도 애틋하고 낭만적이어서 마치 완전한 인간들의 사랑을 보는 것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거기에 오리지널 작을 본 관객이라면 쉽게 간파할 수 있는 영화사적 오마주까지 가미해,  위대한 스펙터클의 숭고미를 그대로 전해주는 피터 잭슨의 <킹 콩>은 진정으로 영화사 최고의 리메이크작 중 하나라고 할 만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최종적으로 <킹 콩>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진보하지 않은 오리엔탈 판타지에 눈 감고 스펙터클의 반동주의에 투항해야 할까? 이데올로기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킹 콩>의 스펙터클에서 우리가 얻은 영화적 쾌락의 의미는 무엇일까? 여전히 명쾌한 해답을 얻을 수 없는 건, 영화에서 미학과 정치학의 딜레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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