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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비평 공간

[다 빈치 코드] 성배(聖杯)의 진실을 찾아서

작성자맑은영혼|작성시간06.05.23|조회수117 목록 댓글 0

성배(聖杯)의 진실을 찾아서 <다 빈치 코드> 

 

김시무/영화평론가 
 
 
 
▲ 감독 론 하워드는 원작의 큰 줄기를 손상시키지 않은 채 살인사건발생을 얼개로 삼아 핵심적 내용들을 비교적 스펙터클한 화면에 담아내는데 성공했다.

 

문제작 <다 빈치 코드 The Da Vinci Code>가 결국 개봉됐다. 신성모독 논란 속에 정상적인 상영이 불투명했던 영화 <다 빈치 코드>. 하지만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영화배급사 (주)소니픽처스릴리징코리아를 상대로 낸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이 법원에 의해 기각됨으로써 일반관객들도 문제의 영화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평론가의 한사람으로써 일단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나는 론 하워드 감독의 <다 빈치 코드>를 보고나서 댄 브라운의 그 발랄한 상상력에 우선무엇보다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사실 ‘다 빈치 코드’의 원조는 따로 있다. 다름 아닌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년-1939년)이다. 올해는 마침 프로이트 선생이 탄생한지 1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해 나는 작심하고 프로이트 전집(출판사 열린책들)을 독파했다. 그 가운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연관하여 생각나는 한 대목을 여기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전집 14권은 『예술, 문학, 정신분석』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이 저서는 제목 그대로 프로이트의 예술평론집이라 할 만한 저작이다. 여기에 열 댓 편의 주옥같은 논문 글이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년의 기억’의 내용을 잠깐 소개할까한다.

 

프로이트는 다 빈치의 소소한 기록들을 꼼꼼히 분석한 결과 그가 동성애자였다는 판단을 내린다. 하지만 내가 감탄한, 또는 주목한 대목은 그 같은 파격적 주장이 아니라 그러한 결론을 도출해내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방식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다 빈치는 어렸을 때 다음과 같은 기억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다 빈치: 내가 이렇게 독수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인 것만 같다.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인 것 같은데, 요람에 누워있을 때 독수리 한마리가 내게로 내려와 꽁지로 내 입을 열고는 여러 번에 걸쳐 그 꽁지로 내 입술을 쳤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아주 어렸을 때 이 같은 기억을 갖고 있다는 주장에는 그 신빙성에 문제가 있지만 그럼에도 이 같은 기록 속에는 다 빈치를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단서가 있다고 본다. 여기서 독수리 꽁지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거시기(성기)라는 것이다. 수동적으로 누워있는 어린 다 빈치의 입속으로 들어온 거시기. 그렇다. 그것은 바로 성적 은유였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독수리인가? 다소 비약(축약)하자면, 여기서 독수리는 다름 아닌 어머니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이집트의 여신 이름은 무트(Mut)인데, 독일어로 어머니는 Mutter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트의 모습이 독수리 형상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고대 (이집트) 전설에 따르면, 독수리는 암컷(엄마)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수컷 없이 어떻게 생식을 하는가? 독수리는 산란(産卵) 때가 되면 고공비행을 한다. 일정한 지점에 상승한 독수리는 잠시 멈추어 자궁을 열고 ‘바람의 힘’으로 수태를 한다는 것. 믿거나 말거나 말이다. 그런데 이런 황당한 전설이 중세 교부들에게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왜일까?

 

처녀 마리아의 수태(受胎)를 입증할 유력한 자연적 증거로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독수리처럼 마리아도 바람의 힘(즉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얘기다. 아무튼 프로이트는 이러저러한 전거(典據)를 끌어대어 다 빈치가 결국 엄마(독수리)와 근친적 사랑에 빠졌고, 그러한 애정관계가 결국 다 빈치의 동성애적 관계로 이어졌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지면관계상 상세한 내용을 소개할 수는 없다. 궁금한 독자들은 그의 저서를 직접 일독하길 권한다. 

 

▲ 로버트 랭던 역을 맡은 톰 행크스의 중후한 연기와 극중 핵심 인물인 소피 늬뵈 역을 맡은 오드레 토투의 섬세한 연기도 눈여겨 볼만하다.

 

내가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은 프로이트의 논리적인 주장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다 빈치의 회화 속에서 독수리(엄마, 또는 성모 마리아 형상)와 사랑에 빠진 어린 다 빈치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다 빈치가 1510년에 완성한 성화(聖畵)인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모자>라는 그림을 한번 주목하기 바란다. 성모 마리아가 어린 예수를 사랑스런 손길로 어루만지고 있는 그 뒤에서 안나(외할머니)가 지극히 온화한 미소로 성모자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림이다.

 

여기서 마리아가 걸치고 있는 푸르스름한 빛깔의 성의(聖衣)를 유심히 보라. 각도를 조금 돌리면 영락없는 독수리의 형상(즉 코드)이다. 그리고 그 독수리의 꽁지는 정확하게 아기 예수의 입으로 향하고 있다. 다 빈치의 유년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위의 인용 문장이 정확히 그의 걸작 가운데 하나인 그 그림 속에서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신기하지 않은가? 우리는 물론 다 빈치의 진짜 의도를 알 수 없다. 프로이트는 단지 몇 가지 기록과 단서들을 통하여 그와 같은 해석을 내리고 있을 따름이다.

 

서두가 길어졌다. 프로이트의 다 빈치 해석을 염두에 둔다면, 댄 브라운이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 속에서 예수의 우편에 앉은 제자를 막달라 마리아(예수의 아내)라고 해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그림속의 제자는 누가 봐도 남자가 아니라 여성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에서는 역사학자 리 티빙 교수가 파워포인트를 통하여 <최후의 만찬>의 그림속의 여성 캐릭터를 예수 옆으로 옮겨놓으면서 두 사람간의 유대감을 확인시켜주는 장면이 나온다.

 

요점은 예수가 십자가 처형 이전에 마리아와 부부관계를 맺었고, 처형 직후 예수의 추종자들이 임신한 마리아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을 시켜 딸아이를 낳았는데, 그녀가 바로 메로빙거 왕조의 시조(始祖)라는 것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소설에서나 영화에서나 공히 작품의 내러티브를 이끌어가는 키워드는 물론 성배(聖杯)이다.

 

그 그림 속에서 마리아(추정)와 예수 사이의 공간이 V자 형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성배를 코드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배란 무엇인가? 사실 이 성배에 대한 해석이야말로 댄 브라운의 소설(또는 영화)가 갖는 미덕(美德) 내지는 악덕(惡德)이 되는 셈이고, 이에 따른 논란도 증폭되어왔다고 할 수 있을 터이다.

 

기독교가 시작된 이래로 성배를 둘러싼 전설은 아주 다양하게 전승되었는데, 이는 보통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성배를 실제로 예수가 최후의 만찬 당시 사용했던 물질적인 잔으로 보는 해석이다. 한마디로 포도주(즉 피의 상징)를 따라 마셨던 (술)잔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인디아나 존스와 최후의 성전>을 보면 주인공이 중동 오지(奧地)의 한 동굴에서 수백 가지의 (술)잔들 가운데 특유의 직관으로 진짜 성배를 찾는다는 설정이 나온다.

 

둘째, 성배란 물리적 잔이라기보다는 예수의 보혈(寶血), 즉 생명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는 신자의 마음이라는 해석이다. 존 부어먼 감독의 걸작 <엑스컬리버>는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이 국운(國運)이 쇠퇴하자 잃어버린 성배를 찾아 온 세상을 헤매다가 결국 모두 사멸(死滅)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물리적 잔의 허망함을 깨닫고 신심(信心)속에서 성배를 찾아야한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한다. 일반적 기독교적 해석이 이에 속할 것이다.

 

셋째는 바로 댄 브라운의 독특한 해석인데, 그는 <다 빈치 코드>를 통해서 성배란 예수의 혈통(血統)을 받은 여성의 몸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손들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가설을 다 빈치 코드를 빌어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주장이 신성모독 논란을 불러 일으켰음은 물론이다.     

 

500여 년의 세월을 건너 온 다 빈치의 작품들을 해석하고 자리매김하는 것은 결국 후세 평자들의 몫이다.

 

우리는 댄 브라운의 이 같은 주장을 곧이곧대로 수용할 수는 없다. 2000년간 면면히 이어진 깊은 전통을 가진 기독교 역사를 한두 가지의 단서들만으로 뒤집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만약 댄 브라운이 신학자의 입장에서 그 같은 주장을 했다면, 반박가능한 전거들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심지어 종교적 파문(破門)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학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소설가의 입장에서 성배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리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의 자유로운 상상력(허구)의 유희(遊戱)를 인정하고 그저 색다른 픽션을 즐기거나 아니면 그냥 무시하면 그뿐이다. “이 영화 때문에 일반인들이 갖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생각이 바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재판부의 판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중요한 것은 특정 텍스트 그 자체에 고정불변의 의미 또는 절대적 진리가 담겨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그랬고, 또 댄 브라운이 그랬듯이 500여 년의 세월을 건너 온 다 빈치의 작품들을 해석하고 자리매김하는 것은 결국 후세 평자들의 몫이다.

 

론 하워드는 할리우드 장르영화의 거장답게 원작의 큰 줄기를 손상시키지 않은 채 살인사건발생을 얼개로 삼아 핵심적 내용들을 비교적 스펙터클한 화면에 담아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소설에서 묘사된 것처럼 그리 준수한 용모가 아닌 하버드 대학 종교 기호학자(semiotician)인 로버트 랭던 역을 맡은 톰 행크스의 중후한 연기와 극중 핵심 인물인 소피 늬뵈 역을 맡은 오드레 토투의 섬세한 연기도 눈여겨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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