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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타유발자들>로 이르는 길들
장르의 법칙을 위반하지 않으면서 한국적 토대에 적응하면서 그 미세한 내러티브의 변용과 장르적 상상력이 즐거웠다. 이런 분위기는 <정글쥬스>의 인생 막장 분위기에서 가끔 그랬고 <지구를 지켜라>에서 한층 두터워지고 튼튼해졌으며 <귀여워>에서 서울이라는 현실로 귀환하고자 했다. 이 영화들이 도모한 내러티브 갈등구조에 대한 한바탕의 종말론과도 같은 폭격과 자폭에 가까운 이데올로기적 과격함은 한국 상업영화라는 자장 안에서 영화의 결말을 한국적 리얼리즘이라는 고루한 영화적 현실로부터 멀찍이 떨어뜨려놓았다.
▲ <구타유발자>는 영화 내적 구조 자체가 설익은 급진주의로 흘러버렸다.
생각하기에도 퍽퍽한 담론으로서의 노동 혹은 여성 같은 범주들을 뛰어넘는 어떤 형이상학적 경지에 이르도록 안내하는 것이었으며 마치 지독한 리얼리즘의 경지에서 전이되는 미니멀리즘 혹은 그 아래 배경으로 떠받치고 있는 우화 같은 알레고리의 모더니즘들이 한국사회 속으로 물감 번지듯 퍼져나가는 것이었다.
<시실리 2km>에서 촉발되는 살인의 연쇄도 따지고 보면 조폭들에게는 다이아몬드를 찾기 위한 것이었고 농촌의 유사 가족 살인집단들에게는 집과 땅 그리고 그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어떤 잔인한 방편들이었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봉구의 납치 동기는 비록 허황되었지만 그에게 잠재되어 있는 내면적 갈등은 어머니의 원한을 갚기 위한 자본-노동의 대립관계를 판타지의 힘을 빌려 복원하려는 것이었던 만큼 정치적 텍스트의 결속에서 거꾸로 읽혀져야 했다.
<귀여워> 역시 도시 빈민들이 자본주의적 틈바구니의 무자비한 톱니바퀴에서 그들의 윤리의식이 분쇄되는 과정과 결과가 바라보는 이들로 하여금 낯설게 보이도록 구조화된 내러티브 혹은 플롯의 전략들이었다. 그리고 <연애의 목적>과 <달콤, 살벌한 연인>이 멜로드라마에서 이런 이질적이지만 새로운 영화들의 계보를 잇는 영화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영화들은 내게는 물론 아주 흥미로운 기억들이었고 동시에 한국영화계의 수확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만의 오롯한 도발이 그 자체로는 쉬이 녹슬어버릴 수 있기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장르의 법칙 중 비교적 공략하기가 쉬운 드라마투르기라는 점을 명백하게 했다. 그리고 그를 역이용할 줄도 알 만큼 믿음직했으며 그리하여 상업적 흥행가능성이라는 담벼락을 쉽게 우회할 수 있는 전략을 구사하는 노련함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결과가 모두 성공적이진 않았지만 말이다.
영화촬영 스타일이라는 형식적 부분이자 동시에 내용 그 자체인 촬영스타일 면에서도 <시실리 2km>와 <지구를 지켜라>의 몇몇 장면들 그리고 <귀여워>, <연애의 목적>에서의 대부분의 장면들에서는 이런 전략적 사고의 유연성과 힘입은 데 더해 충분히 설득력 있는 미장센과 촬영스타일을 유지했다.
▲ 영화의 이데올로기는 부르주아의 위선을 까발리기엔 폭력의 행사 자체의 정당성을 위한 포석을 능숙하게 풀어놓지 못한다.
그들은 흔들리는 핸드 헬드 카메라의 불안정한 시점의 유동적 원근법 교란이 가져올 효과가 관객들과의 관계를 한층 다층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도 알고 있었고 미장센 짜기에 있어서 화면 밖과 안 그리고 그것이 단지 관객과 배우들만의 일차원적인 관계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시간적 공간적 구성과 더불어 좀 더 은밀한 기호학적 의미론적 탐색과 포석이 가능하다는 것도 간파했다. 그것은 결론적으로 말해 영화적 성취로서는 눈여겨볼 만한 것이었다.
잠재적 텍스트와 표면적 텍스트의 구조적 결점들
<구타유발자>를 말하기에 앞서 이렇게 장황하게 이 영화가 가닿을 수 있는 영화적 계보를 훑고 나서는 이유는 이러한 계보들에 비추어보았을 때 <구타유발자>는 이전 성과들을 그다지 본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더불어 영화 내적 구조 자체가 설익은 급진주의로 흘러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겨누고 있는 담론의 칼끝이 스스로를 붕괴시키는 전형성만을 답습하게 하고 눈에 띄는 것이라곤 이문식과 오달수의 역할이 전도되어있는 것이 분명해 보일 지경이다.
<구타유발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마 부르주아 지식인의 위선과 외딴 곳에서 맞닥뜨린 시골양아치들과 생기게 되는 어떤 날카로운 충돌과 같은 것 그 작은 소동이 이내 비겁함과 잔인함 그리고 인간 밑바닥에 잠재해있는 본능과 같은 충동들을 전면화 시켜내는 것이었던 듯하다. 이런 잠재적 충동들의 분출이 기차가 다니는 다리 아래 휘돌아 흐르는 강과 서로를 지켜보듯 높이 솟은 산골 사이의 작은 공간에서 극단적으로 펼쳐지길 바랐을 것이다.
마치 미카엘 하네케의 단골 주제인 파시즘적 폭력처럼 그려지거나 <복수는 나의 것>처럼 종국에 가서는 어떤 원한의 알레고리가 폭발하고 산화해가고자 의도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 <구타유발자>의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부르주아의 위선을 까발리기엔 폭력의 행사 자체의 정당성을 위한 포석을 능숙하게 풀어놓지 못한다. 영화의 잠재적 텍스트를 위해선 관객과 일정수준에서의 거짓 동기와 표면적 텍스트를 구축할 필요가 있는데 그 구분이 모호한 나머지 의미화 되는 순간의 이데올로기 역시 뜬금없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초반과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한석규 그리고 그의 동생이 이질적 텍스트로서 끼어들면서 영화가 나름의 반전을 꾀하기는 하나 그것을 반전으로 이해하기에는 이미 이야기의 중심도 인물들 사이의 관계는 서로 뒤엉켜있는 상태이다.
<구타유발자들>의 영화적 계보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들
▲ 시나리오의 에너지를 살려내기 위해서 이전의 영화적 전통과 최근의 성과물들 그리고 잘 짜진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성악과 교수와 여제자의 드라이브가 <텍사스 전기톱 학살>처럼 어느 이상한 산골 좁은 강가에서 양아치 이문식의 비열한 이중성과 오달수의 반쯤 정신 나간 상태 그리고 나머지 두 양아치의 폭력에 유린당하는 것은 관객들에게 급작스런 ‘소외효과’를 일으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장면들은 의도된 대로 불쾌하다. 산과 강가 그리고 하얀색 벤츠를 둘러싸고 지루하게 이어지는 이들의 처절한 사투들은 관객들을 점점 ‘매 맞는 아내’가 된 심정 같은 폭력에 대한 자포자기와 무감각한 상태로 몰고 가면서 이들이 정작 의도했을 법한 ‘폭력에 대한 성찰’은 애초부터 고려대상에서 제외되어버린 상태이기 때문이다.
히치콕이 위대했던 이유 그리고 그의 영화가 끝없는 신화로서 재현되는 이유는 <구타유발자들>처럼 단 하나의 공간에서 거의 모든 사건이 벌어짐에도 불구하고 세심한 플롯과 복선으로 흥미로운 연극적 공간 안에서의 살인사건을 그려낸 <로프>와의 비교를 통해서도 금방 드러난다.
<구타유발자>는 영진위 주최 최우수 시나리오 상을 받은 영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결과물은 시나리오의 에너지를 살려내기 위해서 이전의 영화적 전통과 최근의 성과물들 그리고 잘 짜진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영화의 주제의식은 매우 훌륭하고 반전과 촬영의 스타일도 여러모로 그다지 모자람이 없지만 갑작스런 동기의 돌출과 어우러진 폭력적 이미지의 무동기적 현현이 때로 스스로를 붕괴시켜버릴 수도 있다는 점을 이전의 영화들에서 여전히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주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이 영화가 표출하고 있는 정서가 매우 이질적이고 공격적이라는 점을 너무나 솔직히 드러내어버린 프로파간다 정신의 과잉이 빚어낸 어떤 자그마한 실수들이 관객들의 무의식에 그대로 전달되어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