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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야기

숲의 숨비소리 <햄넷> 리뷰

작성자소대가리|작성시간26.03.01|조회수1,352 목록 댓글 2

오르페우스는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찾아 저승으로 향한다. 하데스의 마음을 움직여 마침내 이승으로 돌아올 기회를 얻지만 조건이 있다. 아내가 따르는 동안 절대 뒤돌아보지 말 것. 걸어가는 동안 발소리는 점차 들리지 않고, 불안에 휩싸인 그는 끝내 돌아선다. 확인하는 순간 아내를 놓치고 만다. 죽음은 돌이킬 수 없으며 인간은 운명 앞에 던져진 가여운 존재임을 신화는 말한다. 필멸하는 우리는 그 슬픔을 이기기 위해 예술이라는 마법에 영혼을 건다. 그렇게 삶은 기억 속에서 불멸을 꿈꾼다.

<햄넷>은 저승을 지나 현실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사랑을 잃고 무너진 이를 다시 일으키는 연극을 통해, 예술이 필요한 순간을 말한다. 슬픔은 절망이 아니라 과정이며, 사랑은 단절이 아니라 순환하는 존재임을 깨닫는 일. 예술로 인해 삶은 기억되고 지속된다.

윌과 아녜스의 만남은 불가항력이었다. 숲 속 마녀의 딸, 매를 키우고 나무와 교감하는 여자가 아녜스라면, 아버지의 강압과 폭력 속에서 내면의 자유를 갈망하던 남자가 윌이었다. 가족들은 반대했지만 서로를 채워줄 것이라는 믿음은 임신과 결혼으로 이어진다. 큰 딸 수잔나를 낳고, 쌍둥이 햄넷과 주디스가 태어난다. 불타오르는 감정으로 시작된 결혼이었지만, 나무처럼 뿌리를 내리려는 아녜스와 물처럼 흘러야 하는 윌의 삶은 조금씩 틈을 만든다. 윌은 돈 때문에 망가져 가는 아버지를 보며 글로 부를 쌓아야 한다는 강박을 품고, 아녜스는 그토록 신뢰했던 어머니를 여의고도 다가가지 못했던 유년의 상처를 안고 있다. 그렇기에 아녜스는 윌의 꿈을 응원하며 묵묵히 아이들을 키워낸다.

일상의 균열은 주디스가 역병에 걸리며 시작된다. 아녜스는 필사적으로 딸의 목숨을 붙들지만, 죽음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햄넷에게 향한다. 쌍둥이 남매는 어린 시절부터 서로를 대신하며 의지해왔다. 햄넷은 주디스가 앓던 밤 곁에 누워 숨을 불어넣으며 죽음을 자신에게로 옮기려는 듯하다. 숭고한 사랑이자, 모계로 전승된 불의 의지처럼 보인다. 그러나 햄넷은 세상을 떠난다.

아녜스는 무너진다. 미래를 본다고 믿었던 자신이 아들의 명운을 예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녀를 더욱 붕괴시킨다. 큰 울음보다 무거운 공백은 윌에 대한 원망으로 굳어진다. 아들이 죽던 날 그는 런던에 있었고, 글만이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아내를 위로하려 하지만 그녀는 온몸으로 거부한다. 붙들고 싶은 마음은 쉽게 닿지 못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윌은 아들의 죽음을 방관하지 않았다. 삶을 이어간다는 것은 먼저 떠나보낸 이를 기억함으로써 영원히 살아 있게 하는 제의와도 같다. 햄넷은 햄릿이 되어 죽음을 넘어선 존재가 된다. 숲의 어두운 굴을 지나 비극이라는 무대의 좁은 문을 통과해 돌아온 셈이다. 아녜스는 비극이 희극으로 바뀌는 구원을 경험한다. 햄넷은 오르페우스처럼 불안에 휩싸이지 않아도 된다. 자신을 기억해줄 누군가가 영원한 안식을 빌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위대한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다루고 있다. 지난 수백 년간 신격화되었지만, 폴 메스칼이 연기한 그의 모습은 충동과 야망에 사로잡힌 인간에 가깝다. 예술은 신이 아니라, 죽음에 비통해하고 괴로워해본 적 있는 자만이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녜스를 연기한 제시 버클리 역시 외면과 거부를 지나 죽음이라는 비극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인물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클로이 자오의 연출은 누군가의 전기가 아니라 감정의 흐름을 포착하려 한다. 그것이야말로 남은 자들의 언어가 먼저 떠난 이를 위로하는 방식임을 보여준다.

클로이 자오의 카메라는 초반부 틸트 다운으로 아녜스를 포착한 컷을 제외하면 고정된 상태로 인물들을 바라본다. 그 조용한 시선은 관객을 능동적 관찰자라기보다 사적인 순간의 목격자로 만든다. 이입 대신 거리감을 두고, 드라마가 아닌 삶을 보게 한다.

<햄넷>은 셰익스피어라는 불세출의 천재를 말하지 않는다. 아픔과 상실을 지나온 부모가 버텨낸 시간을 말한다. 그들은 떠올릴 것이다. 아이들에게 로즈메리 잎을 뜯으며 기억력이 좋아지는 허브라고 말했던 순간을. 무대에서 선왕 햄릿은 아들에게 말한다. “나를 기억해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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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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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안경 선배 | 작성시간 26.03.01 그래서 오르페우스 이야기가 나온 것이군요 이제 이해했습니다^^ 예술의 효용은 익히 알고 있는데도 항상 호소력이 있어서 잘 봤습니다. 햄릿의 재해석이나 다른 상상력을 발휘한 내용인 준 알았는데 가족드라마였어요. 글도 그렇겠지요. 글로서 감상과 글쓴이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리뷰 감사합니다~
  • 작성자코코아마녀 | 작성시간 26.03.17 오늘도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소대가리님의 리뷰는 읽고나면 늘 영화를 더 궁금하게 만들어 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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