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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야기

폐허를 걷는 기억의 상흔 <파리, 텍사스> 리뷰

작성자소대가리|작성시간26.03.23|조회수376 목록 댓글 5

길은 누군가에게 가능성을 향한 빛이지만, 모든 것을 잃은 사람에게는 어제를 갉아먹는 폐허일 뿐이다. 발을 들인 존재는 벗어나지 못하며, 기억은 회복 불가능의 상처로 남아 영원히 떠돈다. <파리, 텍사스>는 그 길 위에 선 인간이 시간이라는 마법으로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추락하는 영혼을 천천히 미끄러지게 만든다. 트래비스라는 고독한 남자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투영할 것인가?

황량한 사막을 초로의 남자가 걷고 있다. 손에 들린 물통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다. 한참을 걷던 그는 한 가게에서 쓰러진다. 그를 발견하고 치료한 의사는 질문을 던지지만,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다. 간단한 소통으로 알아낸 그의 정보는 월트라는 동생이 있다는 것과 이름이 트래비스라는 사실뿐. 의사는 이내 알게 된다. 그의 침묵은 상처가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멀어진 자신의 선택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세계라는 선을 이탈한 방랑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더 이상의 질문과 추론을 멈춘다. 그저 물을 건네며 안정을 취하도록 돕는다. 그는 트래비스가 경계에 있음을 직감한다.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그저 지켜볼 뿐이다.

사라졌던 형의 소식을 들은 월트는 곧장 그를 데리러 간다. 재회한 형제 사이에는 반가움과 동시에 낯섦이 흐른다.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내는 동안, 동생의 삶은 다른 방식으로 정착해 있었다. 월트는 형이 사막에서 길을 잃고 있는 동안, 아내 앤과 함께 아들 헌터를 키워왔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안정적인 가정을 유지해 온 월트와 앤은, 역할로 유지해 온 이 가정이 혈연에 의해 흔들릴까 두려워한다. 서로의 위치를 조심스럽게 확인하며 긴장을 유지한다. 월트는 형을 밀어내지는 않지만, 자신이 구축해 온 아버지의 자리에 대한 책임감을 놓지 않는다. 반면 트래비스는 헌터와 가까워질수록, 월트가 아들과 함께 쌓아온 시간을 의식하게 된다. 월트는 헌터가 친부와 유대를 느낄 수 있도록 그 시간을 허용한다. 이 지점에서 두 사람은 각자의 역할을 깨닫는다. 월트는 남고, 트래비스는 떠나야 한다.

트래비스의 마지막 여정은 헌터와 함께하는 엄마 제인을 찾는 휴스턴행이다. 그곳에서 트래비스는 제인과 거울을 사이에 둔 채, 서로를 인지하지 못한 상태로 재회한다. 그녀의 직업은 유리벽 너머에서 타인에게 몸을 보여주고, 말을 들어주는 일이다. 4년 만에 아내를 마주한 트래비스는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으로 풀어낸다. 함께했던 시간이 점점 미움으로 변해가던 순간들, 그것은 고백이라기보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사죄에 가깝다. 알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해 온 현실—자신의 자리가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은 씁쓸하게 드러난다. 그가 전전하던 모텔과 아들을 맡긴 호텔은 그의 정체성처럼 남는다. 머무름을 전제하지만, 결국 떠나야 하는 공간. 사랑의 회상조차 지불이라는 계약으로만 이루어진다. 그래서 트래비스의 선택은 도피가 아니라 인식이다.

그는 동생과 아들에게 텍사스 주의 파리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부모가 사랑을 나누고 자신을 낳은 곳. 그러나 떠나야 하는 트래비스에게 ‘파리, 텍사스’는 미국과 유럽만큼이나 멀게 느껴진다. 호텔에서 다시 만난 아들과 엄마를 뒤로한 채 떠나는 그의 배경에는 석양의 붉은 선 위로 파랑이 내려앉는다. 감정은 식어가고, 사랑 혹은 미련은 흔적만 남는다.

두 개의 색은 영화에서 감정의 미장센을 대신한다. 빨강은 잔열로 남은 흔적이고, 파랑은 차갑게 식어버린 과거다. 그들은 빨간 모자를 쓰고 빨간 차를 쫓아, 빨간 옷을 입은 여자에게 못다 한 말을 건넨다. 그리고 파란 하늘 아래, 푸른 불빛이 스며든 공간에서 마음을 정리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말했다. “우리는 각자 존재하고, 나는 홀로 소멸하게 된다.” 관계가 회복될 것이라는 환상은 석양처럼 부서진다. 누군가는 떠나야 하고, 또 누군가는 남아야 한다. 길은 어디로 갈지를 묻지 않는다. 다만 무엇을 지우며 여기까지 왔는지를 묻는다. 빔 벤더스는 복원 실패의 현장을 냉담하게 지켜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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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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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안경 선배 | 작성시간 26.03.23 소개 감사합니다.어릴 땐 관계가 번거롭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점점 약해지네요. 그래서 트래비스의 마음 속 폐허가 와닿습니다. 트래비스의 상흔이 고립을 낳은 건가봐요. 밝은 영화도 보세요. 참, 제발트의 전기가 새로 나왔데요.
  • 답댓글 작성자소대가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3.23 라이쿠더의 슬라이드 기타가 깔리면서 감정을 증폭합니다.
  • 작성자코코아마녀 | 작성시간 26.03.23 제대로 이해도 못했는데 읽다보니 코끝이 찡하다 선배님 댓글까지 읽고나니 눈물이 주룩... 쉬는시간에 사연있는 여자가 되어버려
  • 답댓글 작성자소대가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3.23 cgv 대구에서 관람
  • 작성자빌바오 | 작성시간 26.03.30 글 잘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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