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불교 이해하기

[스크랩] 불교의 무심(無心)이란 말의 의미

작성자자광|작성시간26.06.13|조회수0 목록 댓글 0

 

사람들은 일상의 삶 속에 무심(無心)하다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저 친구, 사는 게 참 무심하구먼.”하는 말은

사는 데에 관심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고, 한심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무심이란 말 속에 일종의 비아냥거림이 숨어 있는 것이다.

무심(無心)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마음이 없다는 의미이다.

불교도 마음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이 없다.”라는 말은

마음의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마음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금강경』에서는 이를 이렇게 말한다.

“과거심(過去心)도 불가득(不可得)이고, 현재심도 불가득이고

미래심도 불가득이다.”

『마하반야초경/도행품』에도 사리불과 수보리의 이런 대화가 있다.

마음이 없다는 말을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묻는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마음이란 존재하는 것인데도, 마음은 없는 것이라 합니까?”

이에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마음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닙니다.

또 얻을 수도 없으며 그 장소를 알 수도 없는 것입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어떻게 마음이 있지도 아니하며 없지도 아니하고

얻을 수도 없고 있는 곳을 알 수도 없다는 말입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상대에 따라서는 비록 유심(有心)도 무심(無心)인 경우가 있으나

이와 같은 마음도 알지 못하는 것이고 또 만들어지는 것도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유심(有心)이라고 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무심(無心)이라 해서 존재하지 아니하는 것도 아닙니다.”」

 

상대에 따라 유심도 무심이 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령 운전을 배울 때를 생각해 보자.

초보자일 때는 자동차의 핸들을 잡으면 온통 신경이 핸들에 집중해 있다.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 운전이 능숙해지면

주변을 돌아보며 이것저것 만지거나 생각도 해가며 핸들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도

운전을 능숙하게 한다. 초보자일 때는 유심이지만 능숙하게 되면

핸들을 잡아도 무심하게 운전할 수 있다. 초보자일 때는 유심이고,

능숙자가 되면 무심이라는 말이 아니다.

상대에 따라 유심도 무심도 된다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무심(無心)이란, 더 나아가 깊은 다른 의미가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심이란 진심(眞心)이 망념(妄念)을 여읜 것을 말한다.

무심(無心)이란 마음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妄心이 환영(幻影)과 같아 自性을 얻을 수 없으므로 無心이라 하며,

또한 잠시 동안 心識이 쉬어서 일어나지 못함으로 무심이라 하며 五位無心과 같다.

 

오위무심(五位無心)이란

무상천(無想天)무심, 무상정(無想定)무심, 멸진정(滅盡定)무심,

극수면(極睡眠)무심, 극민절(極悶絶)무심을 말한다.

무상천과 무상정무심은 외도가 선정(禪定)에 든 무심을 말하고

멸진정무심은 아라한이 선정에 든 무심이다.

선정(禪定)에서는 육식(六識)의 기능이 멈추기 때문이다.

극수면은 깊은 잠에 떨어지는 것을 말하며,

극민절은 졸도나 기절을 하는 경우 의식이 끊어지기 때문에 무심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심(無心)의 상대어는 유심(有心)이다.

유심(有心)은 곧 분별심을 말하고,

분별심은 진심(眞心)에 대비하면 망심(妄心)이 된다.

 

<종경록 45>의 『대보적경(大寶積經)』에 이런 말이 있다.

“一念의 망념이 잠깐 움직여도 세간의 갖은 고통(諸苦)을 받는다.

사람이 가시덤불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움직이지 않으면

찔리거나 상하지 않는다. 망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항상 적멸의 즐거움에 處하고,

일념 망심이 조금만 움직이면 모든 자상(刺傷)을 입는다. ” 라고 했다.

“有心은 모두 괴롭고 無心은 곧 즐거움이다.”라는 의미다.

<금강경>에 “과거심도 불가득이고, 현재심도 불가득이고,

미래심도 불가득이다.”라는 말은 진심이 아니라 망심이 그렇다는 의미다.

왜 그런가?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자성이 없다는 말은 실체가 없다는 의미다.

왜 분별심을 망심이라고 하는가?

세간은 실체 없이 분별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분별 때문에 분별의 마음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마음이 원인이 되어 곧 몸의 태어남이 있는 까닭이다.

생노병사(生老病死), 희비애락(喜悲哀樂)

모두 이 마음의 분별에 의지해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몸은 세간에서 작용하는 것이다.

세간에서 작용한다는 말은 일체 세간은 분별하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심이 아니기에 망심이라고 하는 것이다.

 

『대승파유론(大乘破有論)』에서 법과 관련하여 말하기를

모든 법에는 원인이 없어 결과도 없을 뿐만 아니라

모든 업()의 자성(自性) 또한 얻을 수 없다.

그로나 여기의 모든 것들은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세간(世間)이 없으므로 출세간(出世間)도 없다.

모든 것에는 발생이 없고(無生) 성품도 있지 않는데(無相)

어떻게 모든 법에 발생하는 바가 있겠는가?라고 했다.

 

무상사진론(無相思塵論)의 말을 빌리면

「내부에(관념으로) 존재하는 사물의(닮은꼴의) 모습[內塵相]’이

마치 외재하는 것처럼 나타나서 ‘식의 대상[識塵]’이 되는 것이다.

식(識)이 그것과 ‘비슷한 것(닮은꼴의 상)’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것[內塵相]을] ‘식의 소연이 되는 연[所緣緣]’이라고 한다.」

그 소연이 바로 분별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다.

실체가 없는 것을 마치 있는 그것처럼 우리 마음이 그려낸다는 의미다.

이는 유식(唯識)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에서는 무심(無心)을 이렇게 말한다.

「무심(無心)이란 모든 법에 대해 무너뜨리거나

분별하지 않는 이것을 무심의 모양이다.」

그렇다면 뱀을 보면 징그러움 마음이 들고, 꽃을 보면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데

그 마음을 일으키는 뱀과 꽃은 성품이 없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것이다.

지혜의 제일인자로 불리는 사리풋타도 수보리에게 이런 의문을 제기하자

공의 일인자인 수보리가 사리풋타에게 답한다.

「있는 바 없는 것[無所有]이 바로 물질의 성품입니다.

있는 바 없는 것이 바로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의 성품이며,

나아가 있는 바 없는 그것이 바로 실제의 성품입니다.

사리불이여, 이런 인연 때문에 물질은 물질의 성품을 여의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은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의 성품을 여의며,

나아가 실제는 실제의 성품을 여읜다고 알아야 합니다.

사리불이여, 물질은 또한 물질의 모양[相]을 여의고 느낌, 생각, 지어감을 여의고,

분별은 또한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의 모양을 여읩니다.

나아가 실제는 또한 실제의 모양을 여의며,

모양도 또한 모양을 여의고 성품도 또한 성품을 여읩니다.」라고 했다.

사물은 일체가 청정하다는 의미다. 그것으로 보고 느끼는 모든 감정은

마음의 분별 작용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불교는 실상(實相)이란 말을 하는데 그 실상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수보리가 부처님에게 묻자,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모든 법은 있는 바가 없이 이와 같이 존재하느니라.

이처럼 있는 바가 없으니, 이 일을 알지 못함을 무명(無明)이라 하느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환술(幻術)로 만들어진 사람[幻人]에게

물질은 뜻이 없고 환술로 만들어진 사람에게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은 뜻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시고

이어서 사리불에게 이르기를

“모든 법의 여(如)는 단지 이름만이 있을 뿐이니 여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법상(法相)ㆍ법성(法性)ㆍ법주(法住)ㆍ실제(實際)는 단지 이름만이 있을 뿐이니

법상(法相)ㆍ법성(法性)ㆍ법주(法住)ㆍ실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부처님은 단지 이름만이 있을 뿐이니,

부처님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아서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대승에 오른다고 합니다.”라고 했다.

수보리에게는 空의 도리로서 말하고,

사리자에게는 식의 견지에서 명자상을 들어 말한 것이다.

모든 지식은 명자상을 통해서 성립되기 때문이다.

이 둘은 다 같이 분별 망상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교가 말하는 일체의 상은 실체가 없는 이름뿐인

모두 망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마음 즉 의식(意識)을 보자.

의식(意識)은 한결같이 집착하지 않는다. 수시로 변한다는 의미다.

없는 것을 있다고 여김으로

실제의 사실이 있다고 생각해도 전체를 생각하지 못하고

부분만 생각하게 되고, 또 식(識)과 흡사한 모습으로 생각한다고 해도

실제의 경계를 떠나므로 그 실제의 경계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의식이란 듣고(聞) 생각함(思)으로 얻어진

지식의 경계만을 관하게 되므로 이와 같은 의식의 소연경(所緣境)은

전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非有]이 된다.

이것은 자취(自聚)를 연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과거와 미래를 연려하는 것은 실사(實事)가 아니기 때문에 허망한 것이다.

 

모든 법은 본래가 무(無)이며 일체가 맑고 깨끗한 것인데,

인연이 생겨나고 멸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라는 의미다.

법은 본래가 생함이 없는 무(無)이기 때문에

모든 법은 머무름이 없다. 머무른다고 하면 그것은 고정관념[想]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念]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이런 것은 “고정관념이 아니다,” “도(道)가 아니다.”“’ 하는 것도

이 또한 고정관념일 뿐이다. 그러므로 고정관념이 없기를 바라는 것까지

끊어버려야 머무름이 없는 데에 머물 수 있다 라는 의미다.

 

앞서 불교의 “무심(無心)”이란 망념(妄念)을 여읜 진심(眞心)이라 했다.

그렇다면 인연으로 생한 그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이는 망심을 버린 진심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이다.

경은 이를 비유로써 말한다.

“물속의 그림자와 같아서 그림자는 물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물 밖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보살이 이 세간에 앉아 있기는 해도

그 몸은 시방세계 어느 곳에나 다 있으며,

그 몸은 또한 시방세계 어느 곳에도 있지 않습니다.” <무극보배삼매경>

망심이란 마음이 일어난다고 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다.

유무(有無)를 벗어난 그 경지가 바로 진심이라는 것이다.

이는 말과 글의 명자상(名字相)으로 표현될 수 없는

깨달음의 경지 곧 일심(一心)을 말하는 것이다.

이 마음은 생멸(生滅)을 벗어난 마음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심(無心)은 일체의 분별 망상을 여읜

깨달음의 경지 즉 심일경(心一境)으로 돌아가라는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경을 보면 「불생(不生)을 관찰하면 한 법도 짓지 않는다.」라는 말도

이를 말하는 것이다. 즉 無心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다음검색
스크랩 원문 : 천성산 용주사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