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 맥문동꽃 앞에서
안창호
내 인생의 가장 따뜻한 기억은 언제나 누님과 함께했던 어린 시절에 머물러 있다. 옹천역 철도관사 뒷산 언덕배기에서 바싹 마른 솔가리를 갈퀴로 긁어모아 내려오던 일, 단옷날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예쁜 치마를 입은 누나가 장터 그네에 나를 태워주던 순간은 지금도 눈부시게 선명하다. 누님은 나보다 열한 살이나 위였고, 집안의 귀한 외딸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누님 곁에서 늘 자식 같은 동생으로 보호받으며 자랐다.
전통 시장에 나가면 가게 주인들은 어머니를 할머니로, 누님을 어머니로 착각하곤 했다. 그만큼 나와 누님 사이의 나이 차는 컸다. 하지만 그 격차는 오히려 내 삶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누님은 늘 나를 데리고 다니며 세상 구경을 시켜주었고, 나는 그 곁에서 세상을 배우며 자랐다.
세월이 흘러 누님은 스물네 살 꽃다운 나이에 중매로 자형을 만나 전통혼례를 올렸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던 나는 병풍 뒤에서 꼬꼬닭 한 쌍을 올리던 그날의 풍경을 또렷이 기억한다. 하지만 누님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성격이 괴팍하고 술버릇이 심했던 자형과의 삶은 누님에게 수많은 고난을 안겨주었다.
영주 하망동 사글세방에서 살던 시절, 심한 가정불화로 누님이 다리를 크게 다친 적이 있었다. 그때 어머니가 올라가 딸의 살림을 오래도록 도와야 했던 일은 아직도 내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누님은 삼 남매를 낳아 기르면서도 늘 고단한 삶을 이어갔다. 그저 수수한 며느리이자 아내, 그리고 어머니로서 마음씨만 좋았던 내 누님의 눈물과 한숨을 지켜보며, 어린 마음에도 가슴이 안타깝고 무거웠다.
그 와중에도 사장어른이 계시는 왕산골 누님 시댁에 다니러 가 하룻밤 자면서, 볏짚 망태기로 마당에 날아든 참새를 잡았던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의 좋은 기억도 있다. 한번은 내가 결혼하기 전, 어머니의 회갑을 맞아 누님 집에서 잔칫상을 마련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의 옛 직장인 전기사무소 직원들이 찾아오셔서 동동주를 나누며 더욱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당시 학교 과학실에서 필름 카메라를 빌려와 분주하게 셔터를 누르는 폼을 여러 차례 잡았지만, 카메라 작동이 서툴렀던 탓에 결국 흑백 필름 현상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날의 빛바랜 사진 한 장 남지 않은 것이 여태껏 아쉬움으로 남는다.
누님은 자식들을 키우며 힘겨운 나날을 버텨냈다. 그러던 어느 날, 대구에서 아버님 기일을 모시고 돌아가는 길에 자형의 졸음운전으로 큰 사고가 발생했다. 영주 부근에서 가로수를 들이받은 지프 안에서 누님은 크게 다쳤고, 안동병원으로 이송되어 장 파열 수술을 받던 중 끝내 세상을 떠났다. 2003년 8월 4일, 음력으로 칠석날이었다.
그날 이후 내 마음속에는 자형에 대한 원망이 깊게 자리 잡았다. 술에 취해 누님을 괴롭히던 일, 부부싸움 끝에 누님을 밀쳐 다치게 했던 일, 그리고 누님이 세상을 떠난 지 석 달도 채 되지 않아 다른 여자를 들이겠다고 했던 말까지…. 모든 기억이 분노와 슬픔으로 뒤엉켜 오랜 세월 나를 옥죄었다.
세월은 흘러 나 또한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어느 날 문득, 독서 치료 강사의 “화분에 꽃이 필 때쯤 바로 용서하고 내려놓으라.”라는 가르침이 마음에 와닿았다. 나는 곧바로 분리수거함에서 헌 플라스틱 김치통을 찾아와 흙을 채웠다. 그리고 그 속에 자형에 대한 원망을 꾹꾹 눌러쓴 종이를 태운 재를 섞어 나만의 ‘용서 화분’을 만들었다.
석 달 후, 그 화분에서 보랏빛 맥문동꽃이 피어났다. 붉은색과 푸른색이 뒤섞여 탄생한 신비로운 바이올렛 빛깔은 내 마음을 어두운 방 밖으로 이끄는 힘이 있었다. ‘겸손’과 ‘변함없는 사랑’, 그리고 ‘인내’라는 꽃말을 가진 그 꽃을 바라보며 나는 깨달았다. 용서란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상처에 갇혀 스스로를 감금해 온 나를 풀어주는 길이라는 것을.
지금 자형은 요양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미수(米壽)를 앞둔 나이에 쇠약해진 그의 모습은 더 이상 원망의 대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세월의 무게에 짓눌린 한 인간으로서 연민이 앞선다. 그를 보며 생각한다. 누님을 괴롭히던 그 시절의 자형은 이미 사라졌고,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저 늙고 병든 한 노인일 뿐이라고.
용서란 결국 나를 위한 선택이었다. 자형을 용서함으로써 내 마음속 깊은 상처와 분노를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고요와 평온이 찾아왔다.
무더운 여름날, 누님이 누워 계신 왕산골 산소를 찾아 가만히 눈으로만 작별을 고한다. ‘목송(目送)’이라 불리는 그 조용한 인사 속에서, 나는 누님에게 속삭인다.
“누나, 이제는 다 내려놓을게요. 당신의 고생과 눈물, 그리고 내 오랜 원망까지 모두 민들레 홀씨처럼 입으로 ‘후~’ 불어 날려 보내겠습니다.”
보랏빛 맥문동꽃은 여전히 피어 있다. 그것은 내 삶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작은 신호다. 과거의 잿빛을 벗어던지고, 이제 나는 용서의 빛 속에서 다시 살아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