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년만 더 이문주
팔순을 바라보는 큰언니가 많이 아프다는 연락을 받았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 허리가 아프다더니 그게 사달이 난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쇠약한 사람이 움직이지 못한다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며칠 뒤 작은언니와 함께 큰언니 집을 찾았다. 언니는 방탄복 같은 보조대를 착용한 채 기운 없는 모습으로 우리를 맞았다. 누워만 있을 거라는 짐작과 달리 집 안에서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말이 고팠던지 그동안의 일을 조곤조곤 털어놓았다. 환하게 웃고는 있었지만, 지난번보다 더 창백하고 야윈 모습은 마치 물기 하나 없이 메마른 나뭇가지 같아 가슴이 먹먹했다. 바람도 쐬고 밥도 먹자며 언니들을 차에 태우고 집을 나섰다.
큰언니는 삼남 삼녀 중 둘째이고 나는 열세 살 터울의 막내다. 살림이 어려웠던 집안의 큰딸로 태어난 언니는 늘 오빠에게 밀리고 동생들에게 양보하며 살아야 했다. 부모님은 어린 나이에 집안일로 고생하는 딸이 안쓰러웠던지, 좋은 혼처라는 중매쟁이의 말만 믿고 스무 살의 언니를 일찍 시집보냈다. 넉넉한 집안이라 편히 살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결혼생활은 고단했다. 인색하고 심술 많은 시어머니 밑에서 시집살이해야 했고, 자기의 딸과 동갑인 시누이를 키워야 했다. 마음이 단단하지 못했던 형부는 언니의 바람막이가 되어주지 못했다. 그래도 언니는 불평 한마디하지 않았다. 이후 형부의 빚보증까지 겹치면서 몸고생과 마음고생이 끊이지 않았다.
맏딸인 언니는 장사로 바쁜 엄마를 대신해 동생들을 돌보고 부엌살림까지 도맡아 했다. 언니가 스무 살에 결혼할 때 나는 겨우 일곱 살이었다. 언니와 부대끼며 자란 기억이 거의 없다. 내가 기억하는 언니는 이미 아이를 낳은 어른이었다. 그래서인지 언니보다 조카들과 더 가깝게 지냈다. 자매였지만 정을 쌓을 시간이 없었다. 나는 너무 어렸고, 언니는 자신의 삶을 감당하기에도 벅찼기 때문이다.
평생 편안한 날보다 힘겨운 날이 많았던 언니는 형부와 사별한 뒤에야 조금은 홀가분한 삶을 사는 듯했다. 좋은 날도 잠시, 나이 칠십에 위암이 찾아왔다. 오래전부터 소화가 안 된다면서도 소화제로 버티다가 병을 키운 셈이었다. 다행히 초기라 수술과 치료를 받으면서 빠르게 회복이 되었다.
그러나 5년 뒤 이번에는 난소암 진단을 받았다. 암이 전이된 것이었다. 소화를 제대로 못 시키니 식사량이 줄었고, 음식도 가려 먹다 보니 몸은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 갔다. 볼은 홀쭉해지고 광대뼈는 더욱 도드라졌다. 근육이 빠져 굵은 핏줄이 팔을 칭칭 감고 있었다. 의사는 몸무게가 40킬로그램밖에 되지 않아 항암치료가 가능할지 걱정된다고 했다. 그럼에도 삶에 대한 의지 하나로 힘든 치료를 잘 견뎌내고 있었다.
치료를 받으면서도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병원에 가보자고 해도 수술하라고 할까 봐 겁이 난다고 버텼다. 더는 참지 못하고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심한 골다공증으로 척추가 내려앉은 뒤였다. 근육이 사라진 몸으로는 약해진 뼈를 지탱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항상 긍정적이고 부지런한 언니였기에 항암 중에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는데 혼자 지내며 식사를 소홀히 하고 무리하게 일한 탓에 결국 몸이 버티지 못한 것이다. 애틋한 정이 없다고 생각했던 언니였지만, 그렇게 늙고 병들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는 돌솥밥과 여러 반찬이 나오는 식당으로 갔다. 입맛이 없어 밥을 못먹을 줄 알았는데 다행히 음식이 입에 맞았는지 젓가락이 쉬지 않았다. 나는 생선을 발라주고 좋아하는 나물 반찬을 언니 앞으로 밀어주었다.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데 문득 그동안 무심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식사를 마친 뒤 근처 공원에 잠시 들렀다. 벤치에 앉아 나누는 옛날이야기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문득 옆을 보니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보던 언니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동생들이 있어 참 좋다. 이렇게 나들이도 시켜주고 맛있는 밥도 사주고... 고맙데이.”
혼자 지내는 외로움과 적적함이 그 한마디에 묻어났다.
“요즘은 엄마 생각이 자꾸 난다. 돌아가시기 전, 병원에 계실 때 좀 더 있다가라고 붙잡는 걸 다음에 또 오겠다며 일어섰는데 그게 참 후회가 된다. 그때 엄마는 얼마나 외롭고 서운했을지 내가 아파보니 알겠다.”
떨리는 목소리에 대꾸할 말이 없었던 나는 괜히 발끝으로 땅만 긁적였다.
“가끔 서로 얼굴 보면서 삼 년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
언니를 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 “삼 년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 그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그날 이후 나는 언니의 떨리는 목소리와 쓸쓸한 뒷모습을 자주 떠올리게 된다. 삼 년만 이 아닌 그보다 조금 더 오래 우리 곁에 있어 달라는 기도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