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두정치(三頭政治)>
로마공화정 말기에 3명의 실력자가 동맹하여 국가권력을 독점한 정치 형태. 전후 2회가 있었다.
【제1차】
BC 60년 평민파 수령 카이사르(시저)는 원로원 벌족파의 세력을 누르기 위하여 장군 폼페이우스, 부호(富豪) 크라수스와
비공식적 동맹을 맺고 다음해 집정관이 되어, 세 사람이 희망하는 정책을 강경하게 실현하였다. 그러나 그 결합은 굳은 것이
아니어서 카이사르가 갈리아지방의 정벌를 위하여 로마를 떠난 사이에 약화되었으므로 BC 56년의 루카회담에서 결속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BC 54년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카이사르의 딸이 죽고, BC 53년 크라수스가 동방 파르티아의 토벌전에서 전사하였기
때문에 3두정치의 일각이 무너져 동맹이 해소되고, BC 48년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격파하고 독재정치를 하게 되었다.
제1차 삼두정치는 로마 공화정 말기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사이에 비밀리에 맺어진 정치적 협력관계를 말한다.
제1차 삼두정치는 대략 기원전 59년에 설립되었는데 당시 로마의 유력자였던 세사람이 원로원의 눈을 피해 서로의 이익을
도모하는 관계로 창설되었고 주창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였을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60년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자신을 반대하는 원로원에 맞서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았다.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의
집정관 당선을 도와주면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퇴역병을 위한 토지배분을 추진하기로 비밀리에 합의하고 크라수스도
협력관계에 끌어들였다.
기원전 59년 카이사르는 원로원파인 비불루스와 함께 무난히 집정관에 당선되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외동딸 율리아와
결혼하고, 카이사르는 루키우스 피소의 딸 칼푸르니아와 결혼했다. 집정관이 된후 카이사르는 삼두정치의 협약에 따라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지원으로 농지법을 개혁하고 원로원을 약화를 꾀했다. 카토와 키케로와 같은 원로원파는 이에
저항했으나 퇴역병과 민중을 선동하여 압력을 가한 삼두정치파에 의해 좌절되었다. 공동집정관인 비불루스는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었고 카이사르는 사실상 남은 임기를 혼자 집정관직을 수행했다.
기원전 56년 세사람은 루카에서 다시 만나 서로의 이해관계를 다시 한번 정했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이듬해의 집정관직
선출을 약속받고 각각 히스파니아와 시리아의 속주 지휘권을 갖기로 하고 카이사르는 갈리아의 지휘권을 5년 더 연장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기원전 54년 율리아가 죽었고 그 이듬해에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와 전쟁을 벌이다가 카르하이 전투에서 전사하자
삼주정치는 위기를 맞았고 폼페이우스는 "원로원"파로 기울기 시작했다. 갈리아에서 카이사르는 다시한번 폼페이우스와
정략결혼으로 동맹을 추구했으나 거절당하고 폼페이우스는 원로원 파인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딸과 결혼했다. 이로서 제1차
삼두정치는 종결되었고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서로 정적이 되었다
【제2차】
BC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제1의 실력자인 안토니우스는 키케로 등 원로원 보수파와 대립하여 BC 43년 호민관
티티우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와 결탁하여 ‘국가재건 3인위원’에 정식으로 취임하였다.
그 결과 5년간의 독재적 권력을 얻은 3자는 일체의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300명의 원로원의원과 2,000명의
기사계급에 있는 자들을 살해 또는 추방하고 속주의 분할통치를 하였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연합하여
필리피싸움에서 반대파의 주력인 공화파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군대를 분쇄하였다.
그 후 3자의 직권은 2번 갱신되었으나, BC 36년 레피두스가 실각하여 3두정치는 자연 소멸되었고, 결국 BC 31년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를 악티움해전에서 결정적으로 격파하고 로마를 통일하여 단독 지배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 때를 계기로 로마공화정은 무너지고 제정(帝政)으로 넘어갔다.
제2차 삼두정치는 로마 공화정 말기인 기원전 43년 당시 로마의 유력자인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가
결성한 일종의 정치, 군사적 협약을 말한다. 5년을 단위로 갱신되어 기원전 33년을 마지막으로 파기되었다. 제1차 삼두정치는
원로원의 눈을 피하기 위해 비밀리에 결성되었으나 제2차 삼두정치는 공인된 형태를 취했고 로마 공화정이 붕괴되고 제정으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사건중에 하나가 되었다.
기원전 43년 11월 26일 북이탈리아의 볼로냐에서 모인 카이사르파의 세사람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 안토니우스는 서로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
"살생부"를 작성하여 반대파를 숙청함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공동으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격파하고 그동안 레피두스는 본국에서 배후를 관리한다.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에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격퇴한 뒤 옥타비아누스는 서부를, 안토니우스는 동부를 각각 분담하여
복구한다며 나누어 통치했다.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 7세와 화려한 궁정생활을 하는 동안 이탈리아에서는
안토니우스의 동생 루키우스와 그의 아내 풀비아가 반란을 일으켰고 옥타비아누스에게 진압되는 일이 일어났다.
안토니우스는 당장 이 반란이 자신과 관계없다고 주장하고 삼두정치의 세사람은 기원전 40년 브린디시에서 다시 만나 서로의
통치영역을 재확인했다. 또한 옥타비아누스는 누나인 옥타비아를 안토니우스와 결혼시켜 동맹을 강화했다.
그후 옥타비아누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다시 협정을 맺고 서로의 적대행위를 종결했다.
레피두스는 일찌감치 삼두정치의 무대에서 내려오고 이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두사람이 제각기 자기의 영역에서
경쟁하게 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결합하고 옥타비아와 이혼했다.
제2차 삼두정치는 기원전 33년 종말을 고하고 로마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내전으로 돌입했다.